필리핀 역사: 1948년,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 취임 - 한국전쟁 때 필리핀 한국 원정군 파병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2024년 10월 14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1948년, 필리핀 2대 부통령이었던 엘피디오 키리노는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서거하면서 대통령직에 오르게 된다. 엘피디오 키리노는 이후 1949년 선거에서 당선되며 1953년까지 필리핀 대통령 자리에 있었는데, 임기 중 경제 재건에 힘썼으나 1945년 마닐라 전투에서 일본군에 의해 아내와 세 아이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전범의 사면을 허용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다. 한국전쟁(1950년~1953년)이 발발하자 7천 명이 넘는 필리핀 한국 원정군(PEFTOK)을 파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엘피디오 키리노
· 본명: Elpidio Rivera Quirino
· 1890년 11월 16일 출생~ 1956년 2월 29일 사망(65세)
· 필리핀 제6대 대통령
· 대통령 재임 기간: 1948년 4월 17일~1953년 12월 30일(5년 257일)
'엘피디오 키리노'는 '엘피디오 퀴리노'라고 표기되기도 한다. 실제 발음은 '키리노'보다 '퀴리노'에 가깝다.
- 1945년 마닐라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아내와 3명의 아이를 잃었으나 일본인 전범을 사면함
- 한국전쟁 때 필리핀 한국 원정군(PEFTOK)을 한반도에 파병함
- 필리핀의 수도를 퀘존 시티로 이전함
정치 입문
엘피디오 키리노는 비간 시티(City of Vigan)의 옛 일로코스 수르 지방 교도소(Old Ilocos Sur jail)에서 태어났다. 그는 출생 장소가 다소 독특한데, 아버지가 지방 교도소의 교도소장이었기 때문이다. 엘피디오 키리노의 아버지는 일로코스 수르(Ilocos Sur) 출신으로 스페인 식민지 시절 군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군대에서 필리핀인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 올라 스페인으로 파견을 나갔을 정도로 유능했던 아버지 아래 자라난 그의 어린 시절은 특별히 알려진 일화가 없을 정도로 평범했다.
정치 생활도 별다른 사건 없이 무난하게 시작했는데, 1915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뒤 법조계에서 일하다 1919년 일로코스 수르의 하원의원에 당선되며 정치계에 입문했다. 그리고 1925년 상원의원으로 선출되며 성공적인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이 시기 엘피디오 키리노는 필리핀 독립위원회의 의원이기도 해서, 마누엘 퀘손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타이딩스-맥더피법(필리핀 독립법)이 통과될 수 있도록 활동했다. 타이딩스-맥더피법이 통과된 이듬해 1935년 필리핀 자치령 코먼웰스(Commonwealth)가 출범한 뒤에는 재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 등의 요직을 거쳤다.
일본 점령기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 이야기를 하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야기가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엘피디오 키리노는 1921년에 비간 출신의 여자와 결혼해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1945년 마닐라 전투(Battle of Manila) 때 일본군에게 아내와 세 아이를 잃었다. 1945년 2월 9일, 마닐라 파코공원 근처에 있던 집에서 폭격을 피해 도망치다가 거리에서 일본군의 무차별 기관총 공격을 받고 한꺼번에 사망한 것이다.
그래서 딸인 빅토리아 키리노 곤잘레스(Victoria Quirino-Gonzalez)는 아버지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1948년에 17세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하여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을 해내야 했다. 빅토리아 키리노 곤잘레스는 '최연소 영부인'이란 타이틀과 함께 '필리핀에서 최초로 퍼스트레이디의 칭호를 받은 사람'이란 타이틀도 가지고 있는데, 엘피디오 키리노 이전의 대통령이었던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호세 라우렐, 세르히오 오스메냐,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의 부인들은 실제로 영부인 역할을 했더라도 공식적으로 퍼스트레이디 칭호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재임 시절 주요 업적
일본 점령기가 끝난 뒤 1946년 4월 23일 필리핀에서는 대선을 치르게 된다. 엘피디오 키리노는 이 선거에 마누엘 로하스의 러닝메이트 대선에 나가 부통령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1948년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타계하면서 대통령 자리를 승계받게 된다. 당시 대통령 임기는 4년이었지만, 그는 6년 가까이 대통령직을 수행했는데 1949년 대선에서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불법 선거가 있었다는 의혹이 있기는 했지만, 절반에 가까운 표를 얻으며 대통령 자리를 이어 나간 엘피디오 키리노는 1949년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강화하고 평화를 회복하는 것에 중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시기에 필리핀 대통령 자리에 오른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에게는 경제 재건이 가장 큰 숙제였다. 그런데 경제 재건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국민에게서 정부에 대한 신뢰를 다시 얻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실 엘피디오 키리노는 국민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외교 능력이 탁월했다고 하여 '외교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국민의 비난을 얻을 만한 결정도 다수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일본인 전쟁 범죄자에게 사면을 허가한 것이다. 마닐라 전투 때 가족이 무참히 살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엘피디오 키리노는 감옥에서 복역 중이던 일본 전범과 필리핀 협력자들에 대해 사면을 허가했다. 엘피디오 키리노는 사면 결정에 대해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자녀와 국민이 일본인에 대한 증오를 물려받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설명했지만, 반일 감정이 가장 격렬했던 시기인지라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행동'이라는 비평을 피할 수 없었다. 일본과의 우호 관계 확립으로 내 가족을 죽이거나 강간한 이들을 용서한다니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마닐라전투에서 일본군에게 가족을 잃고, 강간을 당하고, 재산을 모두 뺏긴 이들에게 전쟁범죄로 사형선고까지 받은 범죄자를 사면하여 일본으로 귀국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여기에 더해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에게는 공산주의 게릴라 조직인 후크발라합(Hukbalahap)의 진압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는 큰 골칫거리였다. 마누엘 퀘손 대통령의 미망인인 아우로라 케손이 후크발라합(Hukbalahap)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정부가 기본 치안마저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엘피디오 키리노의 정책이 모두 나쁜 평가를 받은 것은 아니다. 그가 했던 일 중에는 필리핀의 수도를 마닐라에서 퀘존 시티로 이전한 것과 같은 긍정적인 일도 많다. 수도 이전과 함께 서민들을 위해 퀘존 시티에 대규모 주택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으며, 농촌 지역의 복지 증진을 위한 정책이 시행되기도 했다. 1951년에 근로자의 최저임금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최저임금법(Minimum Wage Law)을 제정한 것도 눈에 띄는 업적이다. 필리핀이 미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필리핀 공화국(Republic of the Philippines) 대통령으로서 미국을 방문한 최초의 대통령답게 여러 외교적 성과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실제 이 시기 미국의 경제적 지원이 늘어났었다고 한다.
필리핀 한국 원정군(PEFTOK)
한국 사람들에게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의 이름이 낯설지 않은 것은 그가 1950년 한국전쟁(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아시아 국가 중에서 가장 먼저 6·25전쟁 파병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 재임 시기 필리핀은 한국전쟁 때 동남아시아 국가연합(ASEAN) 중에서 가장 많은 인원인 7,420명의 전투병을 보냈다. 5개 전투대대 7,420명이 1950년부터 5년간 필리핀 한국 원정군(PEFTOK)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싸웠다. 그리고 수많은 전투와 작전을 수행하는 가운데 전사 112명, 실종 16명, 부상 299명의 희생자를 냈다.
그런데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이 보낸 필리핀 한국 원정군(PEFTOK)에는 아들과 사위도 있었다.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은 자녀가 다섯이나 있었지만, 1945년 마닐라 전투 때 일본군이 후퇴하며 저지른 참혹한 학살에서 빅토리아 키리노(Victoria Quirino-Gonzalez)와 토미 키리노(Tomas Syquia Tommy Quirino)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딸인 빅토리아 키리노는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었던 터라 매우 유명하지만, 아들인 토미 키리노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1953년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당시 토미 키리노는 미 육군 보병 장교 과정을 졸업한 뒤 통신부대원으로 한국에 파병되어 펀치볼 전투 등에 참전했다고 한다. 사위인 루이스 곤잘레스(Luis Gonzalez)는 항공 조종사라서 미국 정찰 비행대의 배치를 받아 작전을 수행했다.
황금 요강 스캔들
엘피디오 키리노는 1953년 대선에서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하며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는 선거 전에 주변 친인척을 주요 요직에 등용했다거나 자금을 횡령했다는 등의 혐의를 받았는데, 황금 아리놀라 스캔들(Golden arinola scandal)과 같은 루머가 돌기도 했다. 엘피디오 키리노가 황금으로 된 아리놀라(침대 아래 놓고 사용하는 요강)를 쓰고 있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 현직 대통령이 250페소짜리 황금 요강과 5천 페소짜리 침대를 사용하고 있다는 소문은 사람들의 귀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나중에 황금 요강 따위는 전혀 없었으며, 침대 역시 300페소였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이미 선거가 끝난 뒤였다. 참고로 엘피디오 키리노가 제정한 최저임금법에 따르면 1951년 노동자의 일일 최저임금은 하루 4페소였다.
퀴리노 그랜드스탠드
엘피디오 키리노는 1956년 2월 29일 향년 6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엘피디오 키리노의 유해는 마닐라 남부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지난 2016년 사망 60주년을 맞아 타귁시티의 국립 영웅묘지(마닐라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이 타계한 뒤 필리핀 정부에서는 그를 기리기 위해 마닐라 리잘파크(리잘공원) 옆에 있는 인디펜던스 그랜드스탠드( Independence Grandstand)의 이름을 퀴리노 그랜드스탠드(Quirino Grandstand)로 바꾸었다. 마닐라 동물원 앞의 퀴리노 애비뉴(Quirino Avenue)와 카가얀밸리 지방에 있는 퀴리노 프라빈스(province of Quirino)도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지명이다.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Office of the Vice President of the Philippines: The History of the Philippine Vice Presidency - Chronology of Vice Presidents
· Official Gazette: Third Republic
· President Elpidio Quirino Foundation: The Life And Times Of President Elpidio R. Quirino
· philstar: President Elpidio Quirino
· The Philippine Star: The Fabulous First Ladies, 1897-2001
· 가족사진 출처: President Elpidio Quirino by Presidential Museum and Library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