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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역사: 후크발라합 공산주의 게릴라 조직과 마누엘 케손 대통령 미망인의 죽음
⚐ 최종 업데이트:
2024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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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크발라합(후크발라하프)은 일본 점령기 때 루손섬 중부 지역에서 조직된 항일인민의용군이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배운 한국인은 후크발라합이 공산주의 게릴라 조직이라는 식의 단순한 설명만 들으면 후크발라합에 대한 거부감이 생길 수도 있지만, 사실 이들은 일본 점령기에 눈부신 항일 운동을 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나 호세 라우렐 등 친일파 정치인들도 하지 못한 일은 한 것이다. 무엇보다 후크발라합을 지지했던 농부들이 가장 원한 것은 공산주의니 민주주의니 하는 이념이 아닌 토지개혁일 가능성이 높다.
후크발라합
Hukbalahap
Hukbong Bayan Laban sa mga Hapon
일본 점령기에 결성된 공산주의 게릴라 조직
주요 활동 시기: 1942년 3월 29일~1954년 5월 17일
후크발라합(Hukbalahap)은 타갈로그어 Hukbong Bayan Laban sa mga Hapon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든 단어로 항일인민군을 의미한다.
토지개혁을 원한 항일 게릴라 조직
이들을 이해하려면 후크발라합이 생긴 지역이 중부 루손 지역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대한 토지가 있는 곳이 루손섬 중부의 땅이다. 이런 땅에서 소작농의 신세가 어떨지는 딱히 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 뜨거운 뙤약볕에서 온종일 일해도 아이들 입에 밥 배불리 넣어주기 힘든 삶이었던 것이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부터 중기적으로 농민 반란을 일으키던 지역 사람들답게 일본 점령기에 루손 지역에서는 항일 게릴라 조직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팜팡가를 중심으로 누에바 에시하와 불라칸, 딸락, 라구나 등 루손섬 중부 지역에 넓게 퍼져 있었는데, 농민 조합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 후크발라합의 게릴라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반일활동을 했다. 1945년 마닐라 전투(Battle of Manila) 시기에도 후크발라합은 대규모 인민군대를 이용하여 항일운동의 눈부신 성과를 이룬다.
하지만 일본이 물러가고 1946년 미국으로부터 독립한 뒤에도 후크발라합은 해체되지 않았다. 후크발라합을 이끌었던 지도자인 루이스 타루크(Luis Mangalus Taruc)는 미국에 의한 독립이 아닌 참된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농민들을 탄압하는 대지주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후크발라합은 미군이 물러간 뒤에도 그들이 가진 무기를 정부에 반납하지 않고, 토지개혁을 외치며 반정부 무장투쟁을 개시했다. 그리고 후크발라합의 무기와 공산주의 성향은 미국이나 필리핀 정부 모두에게 불안 요소로 여겨졌다. 필리핀 정부 입장에서 후크발라합은 공산주의 반란군에 불과했다.
아우로라 케손의 사망
1949년 4월 28일, 후크발라합의 이미지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사건이 하나 일어난다. 미국 식민지 시대 필리핀 자치령(코먼웰스)의 대통령이었던 마누엘 케손 대통령의 미망인인 아우로라 케손(Aurora Antonia Aragon Quezon)이 매복 공격을 당해 사망한 것이다. 남편인 마누엘 케손이 미국 망명 생활 중 결핵으로 사망한 뒤 필리핀으로 귀국해서 길모어 애비뉴의 주택에 살며 필리핀 적십자사(PRC)의 초대 의장으로 활동하던 아우로라 퀘손은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존재였다. 필리핀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캠페인에 참여하는 등 사회 공헌 활동도 상당히 많이 했는데 자신보다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는 많은 전쟁 미망인과 고아들이 있다면서 정부가 제안한 연금 수령을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기도 하다.
1949년 습격 사건 당시 아우로라 케손은 남편을 기리기 위해 케손 기념 병원 헌정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인 발레르(Baler)로 가던 길이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고향에 도착하기 전 무장 괴한의 습격으로 아우로라 케손은 물론 그녀의 딸까지 사망했다. 산길을 막은 무장 괴한들에 의해 아우로라 케손이 사망했다는 소식은 널리 퍼졌고, 범인들은 많은 비난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 아우로라 케손 습격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단체가 바로 후크발라합(Hukbalahap)이었다.
일본 졈령기에만 해도 일본의 학대로부터 보호해 주는 사람들로 여겨졌던 후크발라합이지만, 아우로라 케손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게 되자 거센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후크발라합의 지도자인 루이스 타루크는 이 사건이 후크발라합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후크발라합의 소행이 아니라는 증거는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 루이스 타루크는 혹시라도 조직 내 배신자가 나와 일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 일이 사실이라면 후크발라합에서 사건 조사를 하지 않았겠느냐는 식의 항변을 하기도 했지만 무장 괴한 중 후크발라합의 일원이 있었음을 목격했다는 증언들이 나오면서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후크 인민해방군으로 개칭
아우로라 케손의 죽음으로 계속되는 비난을 받게 되자 1950년 후크발라합(Hukbalahap)은 인민해방군(인민의용군)이라는 의미의 후크본(Hukbong Mapagpalaya ng Bayan)으로 그 이름을 바꾼다.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무장 게릴라 활동에 나서며 완전독립과 토지개혁을 요구한다. 후크(Huk)의 단원은 약 7만 명에 불과했지만, 이들 단원 뒤에는 약 50만 명의 동조자가 있었으니 루손섬 중부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는 것에 성공한다.
하지만 농민들의 지지만으로 필리핀 정부의 반란 진압을 이길 수는 없었다. 게다가 후크발라합이 마을 사람들의 재산을 강제로 뺏어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동조자마저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다. 이 시기 필리핀 정부에서 후크발라합을 공산주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적극적으로 진압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진압 과정에서 조직에서 핵심 역할을 하던 이들이 체포되면서 후크 인민해방군의 세력은 약해지기 시작했다. 루이스 타루크는 점점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갔지만, 1954년 필리핀 정부에 항복해야만 했다. 루이스 타루크는 항복 후 반란 혐의로 재판을 받았는데 유죄 판결을 받고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루이스 타루크가 감옥에 간 뒤에도 후크본은 1970년대까지 활동했지만, 파벌로 분열된 채 활동하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이후 루이스 타루크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그는 1968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에 의해 사면되었는데 감옥에서 나온 이후에도 토지 개혁을 위해 일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기독교 사회주의를 옹호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루이스 타루크는 의외로 장수했는데, 2005년 92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가 태어난 팜팡가의 산루이스에 가면 루이스 타루크 기념물(Luis Taruc Monument)을 볼 수 있다.
· Philippine Folklife Museum Foundatio: Aurora Antonia Aragon de Quezon
· Encyclopedia Britannica: Hukbalahap Rebellion
· The Philippine Star: The Fabulous First Ladies, 1897-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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