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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역사: 1935년, 마누엘 케손 대통령 취임- 미국 식민지 시대 필리핀 자치령(코먼웰스)의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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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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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언제는 바쁘지 않았던 해가 있었겠느냐만 1935년, 그해에는 참으로 많은 일이 일어났다. 80만이라는 우리의 농민이 일본 척무성의 결정에 따라 만주로 보내지는 등 식민지의 고통은 끝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일제가 민족 말살 통치를 하던 그 억센 시련의 시기에도 손기정이 경성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25분 14초로 비공인 세계신기록 수립했고, 소설가 심훈이 민중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브나로드 운동을 실천하던 농촌 운동가들의 삶을 '상록수'라는 제목의 소설로 그려 그의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그 당시 필리핀에서는 마누엘 루이스 케손이 필리핀 자치령 코먼웰스(Commonwealth)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마누엘 루이스 케손
· 본명: Manuel Luis Quezon y Molina
· 1878년 8월 19일 출생~1944년 8월 1일 사망(65세)
· 필리핀 제2대 대통령
· 대통령 재임 기간: 1935년 11월 15일~1944년 8월 1일(8년 260일)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 용례'에 따르면 'Quezon'은 '케손'으로 표기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한다. 하지만 필리핀 사람들은 '퀘존'에 가깝게 발음한다.
- 미국의 보호 아래 수립된 필리핀 자치령 코먼웰스의 초대 대통령
- 타갈로그어를 필리핀 국어로 채택하여 '필리핀 국어의 아버지'라고 불림
- 20페소 지폐의 인물
어린 시절
마누엘 케손 대통령은 역대 필리핀 대통령 중에서 단연 좀 돋보이는 인물이다. 미국 식민지 시대의 대통령이라 그런지 언뜻 사진을 보면 미국계 혼혈이 아닐까 싶지만, 어머니가 스페인계 혼혈이라고 한다. 필리핀에서 스페인에 대한 독립운동이 한창일 때 마누엘 케손은 대학생이었다고 한다. 산토 토마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청년 마누엘 케손은 학업도 포기하고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이끄는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필리핀-미국 전쟁 중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미국에 체포되어 충성선서를 하는 것을 보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1903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뒤 정치판에 뛰어들게 된다.
1906년에 타야바스 주(현재의 퀘존주)의 주지사가 된 마누엘 퀘손은 하원과 상원을 두루 거치며 정치 경력을 쌓는다. 이 시기 그는 존스법과 타이딩스-맥더피법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는데, 미국과 협상하는 것만이 필리핀이 독립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필리핀 국어의 아버지
1901년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미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면서 필리핀 제1공화국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이후 필리핀은 미국 대통령의 임명을 받은 총독이 통치했다. 그러다가 1935년 필리핀 자치령 코먼웰스(Commonwealth)가 시작되면서 총독 대신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이 취임했다. 미국의 보호 아래 수립된 필리핀 자치령 코먼웰스의 초대 대통령이 된 사람은 바로 마누엘 L. 케손(Manuel Luis Quezon y Molina)이다.
1935년 9월 17일 선거에서 에밀리오 아기날도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마누엘 케손은 정부 조직을 개편하고, 교육을 개혁하고자 했다. 마누엘 케손 대통령은 그 어떤 대통령보다도 공정한 정치를 하려 노력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모든 국민이 자신을 존경하고 있기 때문에 경호원이 없어도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마누엘 케손 대통령은 그 어떤 시기보다 어려운 시기에 대통령이 되었지만, 필리핀의 독립과 개혁을 위해 힘썼다. 타갈로그어를 국가 언어(국어)로 선언하기도 하고, 수도 이전을 계획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누엘 케손은 필리핀의 제2대 대통령으로 1935년 선거와 1941년 선거에서 모두 당선되었다. 그의 임기는 1943년 12월 30일에 끝났지만, 일본과의 전쟁으로 미국에 망명 정부를 수립했던 상황인 터라 1943년 11월 15일 미국에서 세 번째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퀘존시티의 개발
1930년대, 마누엘 케손 대통령은 마닐라 도심에서 가까우면서도 매우 넓고, 평화로워 보이는 토지를 발견했다. 필리핀이 10년 뒤에 독립하게 되면 오랜 식민 통치의 중심지였던 마닐라가 아닌 새로운 행정 수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마누엘 케손은 1939년에 이 땅을 매입했고,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따서 퀘손시티(퀘존시티)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그의 뜻을 펼치기 힘든 시절이었다. 1942년 일본이 필리핀을 침략하자 그는 필리핀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미국으로 망명한 마누엘 케손은 미국 워싱턴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태평양 전쟁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필리핀의 독립을 꿈꾸었다. 하지만 그는 1944년 8월 1일에 미국 뉴욕의 한 병원에서 결핵으로 사망하면서 퀘존시티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직접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야 했다. 마누엘 루이스 케손 대통령의 유해는 마닐라에 있는 퀘존 메모리얼 서클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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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cyclopedia Britannica: Manuel Quezon
· 유네스코와 유산: 마누엘 L. 케손 대통령의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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