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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역사: 1946년,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 취임 - 100페소 지폐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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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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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100페소 지폐의 주인공인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은 1946년 4월의 선거에 당선되며 루이스 케손 대통령과 세르히오 오스메냐 대통령 뒤를 이어 필리핀 자치령 코먼웰스의 대통령이 된 인물이다. 이후 1946년 7월 4일 필리핀이 미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필리핀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정식 취임했다. 전쟁이 막 끝나고 사회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대통령 자리에 오른 그는 전후 복구사업에 힘쓴 대통령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필리핀을 통치하는 권력에 아첨한 아시엔다(hacienda) 지주계급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은 약 2년 정도밖에 대통령 자리에 있지 못했는데,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이 타계한 뒤 부통령이었던 엘피디오 키리노가 제6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마누엘 로하스
· 본명: Manuel Acuña Roxas
· 1892년 1월 1일 출생~ 1948년 4월 15일 사망(56세)
· 필리핀 제5대 대통령(필리핀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 대통령 재임 기간: 1946년 5월 28일~1948년 4월 15일(1년 323일)
- 필리핀 독립 전에 대통령에 당선되어 1946년 7월 4일 필리핀의 독립을 정식으로 선포한 대통령
- 미군에 군사기지 사용을 허용하고 친일 협력자를 일반사면 처리함
- 100페소 지폐의 인물
어린 시절
마누엘 로하스(Manuel A. Roxas)는 1892년 카피즈(현재의 로하스 시티)에서 태어났다.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외할아버지 그늘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마닐라에서 학교에 다녔는데 1913년 변호사 시험에서 1등을 차지할 정도로 학업 성적이 우수했다고 한다. 마누엘 로하스는 1917년에 자신의 고향인 카피즈의 시의회 의원에 당선되며 정치계에 입문했는데, 서른 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였다. 이후 그는 카피즈의 최연소 주지사가 되었고, 그 경력을 발판 삼아 1922년 하원의원으로 선출된다. 그리고 하원의장과 재무부 장관, 상원의원 등의 자리를 역임했다.
일본 점령기
1941년 일본이 필리핀 내 미군 기지를 공습하고 마닐라까지 점령하며 상황이 위태로워지자 마누엘 케손 대통령은 코레히도르를 통해 미국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때 마누엘 케손 대통령이나 세르히오 오스메냐 부통령이 사망할 경우 대통령직의 후임자로 지명된 사람이 마누엘 로하스이다. 하지만 그는 1942년 4월 일본 침략군에 의해 포로로 잡힌다. 그리고 필리핀 제2공화국(일본에 의한 괴뢰정부)의 대통령으로 취임한 호세 라우렐을 위해 일하게 된다. 그런데 이 시기 마누엘 로하스가 호세 라우렐과 함께 진행한 쌀 공급 정책이 일본의 극심한 쌀 수탈과 쌀 가격 인상을 불러왔다. 그의 정책이 일본에 쌀을 보내지 않으려는 목적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결과적으로 일본군을 위한 쌀 공급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이 시기 마누엘 로하스는 일본의 식량 수탈로 기아 수준의 굶주림에 시달려야만 했던 농민들에게 큰 비난을 받게 된다.
1946년 선거
일본 점령기가 끝나고 1946년 4월 23일, 필리핀에서는 선거가 치러졌다. 필리핀이 미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에 치루는 필리핀 자치령 코먼웰스의 마지막 선거였다. 1946년 선거에서 마누엘 로하스의 가장 강력한 경쟁 상대는 제4대 대통령인 세르히오 오스메냐 대통령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비롯하여 미국 측의 지지를 받은 사람은 바로 마누엘 로하스였다. 마누엘 로하스가 필리핀이 독립한 뒤에도 미국에서 필리핀에 있는 군사기지를 유지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영향력을 이용하여 필리핀 의회가 군사기지 유지에 찬성하도록 하겠다는 이야기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마누엘 로하스는 신문 선거 보도를 그의 선거 캠페인 광고처럼 이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편, 세르히오 오스메냐는 필리핀 국민이 이미 자신을 알고 있다며 마누엘 로하스와 같은 선거 캠페인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치열한 접전 끝에 마누엘 로하스가 코먼웰스의 마지막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다.
필리핀 말라카냥궁의 칼라야안홀(Kalayaan Hall)의 전시관에 있던 1946년 대선 선거 결과 득표수를 보면 당시 전체 유효투표수 2,218,847표 중 마누엘 로하스가 1,333,392표를 득표하여 대통령에 당선된 것을 볼 수 있다. 세르히오 오스메냐는 1,129,994표를 얻었다. 1946년 5월 28일, 마누엘 로하스는 마닐라 전투(Battle of Manila)로 완전히 파괴된 입법부(Legislative Building) 건물 앞에 세워진 임시 무대에서 필리핀 자치령 코먼웰스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통령으로서 취임 선서를 했다. 마누엘 로하스는 1946년 7월 4일 미국으로부터 필리핀이 독립하게 되면서 필리핀의 독립을 정식으로 선포하고, 필리핀공화국의 초대 대통령(필리핀 제3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전후 복구
태평양 전쟁(대동아 전쟁)은 1945년 8월 미국이 원자 폭탄을 투하함으로써 끝이 났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은 USS 미주리 전함에서 맥아더 장군의 감독하에 항복문서에 공식적으로 서명했다. 하지만 항복문서에 서명을 받는다고 하여 전쟁으로 파괴된 시설이 복구되는 것은 아니었다. 파괴된 시설을 재건하고, 경제를 다시 살리는 것이 시급했다. 미국에서 구호품을 받는 일은 생존과 연관되는 일이 되었고, 필리핀 자치정부는 미국에 더 강하게 의존하게 되었다.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은 취임 후 첫 국가연설에서 "국가의 기본적인 기능조차 지원할 재정적 수단이 없습니다"라며 전쟁으로 정부가 직면한 어려움을 호소해야만 했다. 극심한 식량 부족 상황에서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은 금융공사(현재의 필리핀 개발은행)를 설립하고, 정부 예산을 늘리기 위한 세법을 개정에 들어갔다.
미군에 군사기지 사용 허용
미국의 강력한 지지 속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마누엘 로하스는 미국에서 막대한 금액의 전후 복구 자금을 지원받았다. 하지만 대신 미국이 필리핀이 독립한 뒤에도 필리핀 내에 미군기지를 유지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중국이 소련에 군사기지를 허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미국에서는 남중국해의 통제권을 유지하기 위해 필리핀의 공군기지와 해군기지를 유지하고자 했고, 전후 자금난에 시달리는 필리핀 정부에서는 군 시설의 유지가 벅차게 느껴졌다. 전후 복구를 미국의 원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마누엘 로하스는 미국과 군사협정을 체결하기로 결정한다.
1947년 3월 14일,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은 미국 대사인 폴 맥넛과 군사협정(MBA, Military Bases Agreement)을 체결한다. 미국에서 클락공군기지와 수빅해군기지, 바탄의 마리벨레스(Mariveles) 군사보호구역 등과 같은 미군 기지를 임대료 없이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이 군사협정은 내용이 상당히 긴 편인데, 미국에서 군사기지의 건설 및 운영, 유지, 통제하는 권한을 가지게 된다는 내용뿐만 아니라 군사 기지 운영에 필요한 수도 시설을 건설할 수 있다는 등의 세부 사항까지 세세하게 적혀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필리핀 사이에 체결된 이 군사협정에 따라 미국에서는 미국 군사 묘지와 미국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를 유지하고 관리할 권리도 가지게 되었다. 참고로 이후 미국은 1991년과 1992년 사이 클락공군기지와 수빅해군기지를 모두 필리핀에서 철수시켰는데, 1986년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 취임 후 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여론이 생겨난 상황에서 1991년 6월 12일 피나투보 화산이 폭발하는 사고까지 발생했기 때문이다. 1947년에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이 서명한 군사협정(MBA)은 "미국과 필리핀 두 정부의 합의에 따라 연장될 수 있는 조건으로 99년간 유효한 조건"으로 체결되었다.
친일협력자에 대한 사면 선언
일본 점령기가 끝나고 구성된 의회가 내놓은 첫 번째 법률은 필리핀 중앙은행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이어 일본 침략기 친일협력자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민 법원(A Peoples Court)이 만들어졌다. 일본이 세운 꼭두각시 정부에서 활동 정치인을 비롯하여 일본에 협력한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관심이 모아졌다.
그러나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은 1948년 1월 28일 친일협력자에 대해 전면 사면하는 것으로 친일협력자에 대한 문제를 종결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어 경제회복만이 중요시되었던 시기라고는 하지만 정치적 필요에 의해 친일협력자에 대한 처리가 급히 종결된 것이다. 이때 살인이나 강간 등과 같은 범죄자는 사면되지 않았지만, 그 외 생존이나 출세 등을 위해 일본에 협력한 친일파나 부일협력자 등과 같은 친일협력자들은 일반사면을 받았다. 그리고 이로 인해 호세 라우렐(필리핀의 제3대 대통령)과 에밀리오 아기날도(필리핀의 제1대 대통령)와 같은 친일협력정권의 주요 인사들도 사면 대상이 되어 필리핀 독립 후에도 다시 필리핀의 주도 세력이 될 수 있었다. 마누엘 로하스 역시 일본 점령기에 호세 라우렐 대통령을 위해 일했다.
필리핀 100페소 지폐의 인물
1948년 4월 15일,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은 클락공군기지에서 연설 후 현기증을 호소했다. 그리고 그날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유해는 마닐라 북부 묘지(Manila North Cemetery)에 안장되었다. 이후 필리핀에서는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민도로와 이사벨라, 코바타토 등 여러 곳의 지명을 로하스 시티(Roxas City)라고 변경했다. 파나이 섬에 있는 그의 고향 카피즈(Capiz)도 그의 이름을 붙여 로하스 시티(Roxas City)로 이름을 바꾸었다. 파사이의 로하스 블러바드(Roxas Boulevard) 역시 로하스 대통령의 이름을 딴 도로인데, 원래는 듀이 블로바드( Dewey Boulevard)라고 불렸다고 한다. 필리핀 100페소를 보면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의 얼굴을 볼 수 있다.
· Supreme Court E-Library: AGREEMENT BETWEEN THE REPUBLIC OF THE PHILIPPINES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CONCERNING MILITARY BASES(March 14, 1947)
· Roxas City: Our Story
· Official Gazette: Inaugural Address of President Roxas, May 28, 1946
· Office of the Vice President of the Philippines: The History of the Philippine Vice Presidency - Chronology of Vice Presidents
· Official Gazette: Third Repub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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