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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역사: 1945년, 마닐라 전투(Battle of Manila)로 10만 명의 민간인 사망

⚐ 최종 업데이트:

2024년 9월 27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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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닐라 전투

Battle of Manila

1945년 2월 3일 - 3월 3일

 


1944년 12월 레이테 전투(Battle of Leyte)를 마친 미국-필리핀 연합군은 신속히 루손섬으로 이동하여 클락을 되찾았다. 그리고 1945년 2월 3일부터 1945년 3월 3일까지 한 달 정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마닐라에서 일본군을 몰아내는 것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 마닐라 전투(Battle of Manila)가 남긴 피해는 극심했다. 마닐라의 거리 곳곳에서 최악의 시가전이 벌어졌고,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그런데 마닐라 전투의 희생자는 군인뿐만이 아니었다.


전쟁이 극에 달하면서 필리핀에서 물러나야만 했던 일본군이 저지른 약탈과 파괴, 강간과 학살은 실로 잔인했다. 일본 퇴각군은 여성이나 아이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마닐라 대학살(Manila massacre)로 수천 명이 한꺼번에 학살되고, 거리 곳곳에서 군인들의 무차별 강간이 자행되었다. 산티아고 요새(포트산티아고)와 라살대학교, 파코성당 등 시내 곳곳이 대학살의 현장이 되었다. 여성들은 마닐라 베이뷰 호텔(Bayview Hotel)로 끌려가 집단 강간을 당한 뒤 잔인하게 살해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일본군의 극악무도한 행위와 미군의 집중 포격으로 목숨을 잃은 무고한 희생자들 대부분은 제대로 된 무덤조차 갖지 못했다. 


마닐라 전투가 끝난 뒤 미군은 마닐라 전투에서의 약 천 명이 넘는 미군이 사망하였다고 발표했다. 필리핀인 민간인 희생자는 최소 10만 명. 전쟁 전 있었던 1939년 인구조사에서 마닐라 지역 인구를 993,889명으로 파악했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마닐라 시민 10명 중 1명은 전쟁으로 사망한 셈이다.


게다가 마닐라 전투로 마닐라의 중요 건물과 도로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최대 격전지였던 인트라무로스는 산아구스틴성당을 제외하고 인트라무로스에 있던 모든 성당을 잃어야만 했다. 중요한 정부 건물이 모조리 파괴되었고, 도로와 다리, 학교도 모두 불태워졌다. 상업 지역 역시 거의 100% 파괴되었다. 일본이 항복한 뒤 마닐라 전투에서 손상된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복구 작업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건물이 다시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파괴된 상태였다.



마닐라 전투로 폐허가 된 인트라무로스의 모습. 우측 상단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성당이 바로 산아구스틴성당(성어거스틴 성당)이다.
마닐라 전투로 폐허가 된 인트라무로스의 모습. 우측 상단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성당이 바로 산아구스틴성당(성어거스틴 성당)이다.
Filipina Comfort Women - 아테네오 박물관(Ateneo Art Gallery)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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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닐라 전투에서의 필리핀인 민간인 사망자 수는 최소 10만 명에 달한다.  

· INQUIRER: February 1945: The Rape of Manila

· 인트라무로스 사진 출처: Destruction of the Walled City (Intramuros), 1945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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