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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역사 유적지: 필리핀 독립 기념 국기게양대 - 1946년 독립기념일 행사의 장소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유적지: 필리핀 독립 기념 국기게양대 - 1946년 독립기념일 행사의 장소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9월 26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필리핀 마닐라 리잘파크, 필리핀 독립 기념 국기게양대(Independence Flagpole) 필리핀 마닐라에 와서 여행 중에 리잘파크(리잘공원)의 호세 리잘 기념비를 보러 갔다가 필리핀 국기를 보았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필리핀의 미국 식민지 시대 역사유적지에 다녀온 셈이 된다. 바로 그 국기가 있는 자리가 필리핀이 1946년 7월 4일 미국으로부터 독립했을 때 필리핀 국기를 게양한 위치이기 때문이다. 필리핀 독립 기념 국기게양대 Independence Flagpole ■ 위치: 필리핀 마닐라 리잘파크, 호세 리잘 기념비 근처 ■ 주소: Ermita, Manila, 1000 Metro Manila, Philippines 마닐라의 리잘파크까지 가도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알고 보면 리잘파크의 호세 리잘 기념비 앞에 있는 국기는 꽤 의미 있는 국기이다. 일단 이 국기게양대는 필리핀에서 가장 높은 깃대를 자랑한다. 하지만 필리핀 정부에서 리잘파크의 국기게양대를 매우 소중하게 관리하는 것은 그 높이보다 역사적 의미 때문이다. 1898년부터 1946년까지 이어졌던 미국 식민지 시대를 끝내는 날, 필리핀 정부에서는 미국의 성조기를 내리고 대신 필리핀 국기를 올리는 국기 게양 행사를 진행했다. 그런데 그때 바로 그 국기게양식을 진행한 자리가 바로 리잘파크의 필리핀 국기가 있는 자리이다. 𖠿 관련 글 보기: 필리핀 역사: 1946년 7월 4일, 미국으로부터 독립한 날 리잘파크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물론 세월의 흐름에 따라 국기는 물론 국기게양대 자체도 바뀌었다. 리잘파크의 국기게양대는 원래 45.72m 높이로 만들어졌었지만, 1995년 태풍으로 국기게양대의 높이가 조금 줄어들었다. 손상된 깃대를 수리하면서 32m로 높이를 줄인 것이다. 이후 바닥 조명 설치 등과 같은 몇 번의 개보수를 거쳐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참고로 대한민국에 국기의 게양·관리 및 선양에 관한 규정이 있는 것처럼 필리핀에도 필리핀 국기에 관한 법이 있는데 이 공화국법(Republic Act 8491) 에 따라 필리핀 독립 기념 국기게양대는 일 년 내내 24시간 국기가 게양된다. 매월 첫 번째 월요일 아침에는 국기 게양식 행사도 진행된다. 필리핀 독립 기념 국기게양대는 인트라무로스에 있는 발루아르테 데 산디에고(Baluarte de San Diego) 석조 요새에서도 보일 정도로 높다. 필리핀 마닐라 리잘파크, 필리핀 독립 기념 국기게양대(Independence Flagpole)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Official Gazette: Statement: DOT on the Rizal Park Independence Flagpole Project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공휴일의 의미와 유래: 바탄 죽음의 행진과 용사의 날(바탄 전투 기념일) - 4월 9일
필리핀 공휴일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공휴일 필리핀 공휴일의 의미와 유래: 바탄 죽음의 행진과 용사의 날(바탄 전투 기념일) - 4월 9일 ⚝ 저작권 안내 :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9월 23일 매년 4월 9일은 아라우 낭 카기팅안(Araw ng Kagitingan)이라고 부르는 필리핀 공휴일이다. 그런데 필리핀어 카기팅안(Kagitingan)을 한국어로 번역하기란 쉽지 않다. 영어로는 Day of Valor라고 적지만, 한국어로는 용사의 날, 용맹의 날, 용기의 날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바탄전투의 희생자를 기리는 날이라서 바탄 전투기념일(바타안 전투기념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주필리핀 대한민국 대사관에서는 휴무일 안내를 할 때 용사의 날(Araw ng Kagitinga)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용사의 날 Araw ng Kagitingan Day of Valor 공휴일 날짜: 매년 4월 9일 1942년 4월 9일, 미군이 일본에 항복하며 바탄 전투(Battle of Bataan) 가 끝났다. 바탄전투에서 약 76,000명의 군인이 살아남았지만, 이들은 모두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야만 했다. 일본군의 포로가 된 미국-필리핀 연합군은 바탄 마리벨레스에서 딸락 카파스에 있는 캠프 오도넬까지 100km 넘는 거리를 행군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최소 1만 명이 굶주림과 탈진, 말라리아 감염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이 비극적인 행군은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 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필리핀 정부에서는 바탄 전투가 끝난 날이자 바탄 죽음의 행진이 시작된 1942년 4월 9일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9일을 용사의 날(Araw ng Kagitinga) 공휴일로 정하고 각종 기념행사 및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용사의 날 주요 행사는 사맛산 바탄 전투 전쟁기념관(Mount Samat National Shrine) 에서 진행된다. 대한민국에서 현충일이 되면 대통령이 국립서울현충원을 방문하여 참배하듯이 필리핀에서도 용사의 날이 되면 필리핀 대통령과 정부 주요 인사가 사맛산에 가서 바탄전투의 희생자의 헌신에 경의를 표하고 추모의 뜻을 나타낸다. 가톨릭 국가답게 가톨릭 미사가 진행된다는 것만 제외하면 추념식은 한국의 현충일과 거의 비슷하게 진행된다. 2024년 행사는 용사의 날 82주년을 기념하여 참전 용사인 펠리시시마 델라 크루즈가 참석하여 종을 울리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한편, 필리핀에서 이렇게 바탄 전쟁의 희생자들을 국가 공휴일로 기리게 된 것은 지난 1961년부터이다. 당시 필리핀의 대통령이었던 카를로스 가르시아 대통령은 공화국법 제3022호(Republic Act No. 3022)를 통해 매년 4월 9일을 바탄의 날(Bataan Day)로 선포했다. 그 후 바탄의 날은 여러 번에 걸쳐 그 이름이 바뀌었는데, 1987년에는 Araw ng Kagitingan(Bataan and Corregidor Day)라고 칭하기도 했다. 필리핀 사람들이 아직도 4월 9일을 바탄 데이(Bataan Day) 또는 코레히도르 데이(Corregidor Day)라고 칭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이때의 기억 때문이다. 그러다가 베니그노 아키노 3세(노이노이 아키노)가 대통령이 되면서 공휴일 이름을 아라우 낭 카기팅안(Araw ng Kagitinga)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2011년 아키노 대통령이 서명한 휴일 관련 선언문(PROCLAMATION NO. 84)을 보면 2011년 4월 9일에 대해 아라우 낭 카기팅안(Araw ng Kagitinga)으로 선포한 것을 알 수 있다. 필리핀에서 용사의 날은 정규휴일(Regular holiday) 로 분류된다. 𖠿 관련 글 보기 필리핀 역사: 1942년, 바탄 반도를 피로 물들인 바탄 전투(Battle of Bataan) 필리핀 역사: 잔인한 4월,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 필리핀 역사 유적지: 바탄 죽음의 행진과 사맛산 십자가 바탄 죽음의 행진 표지석 사맛산 바탄 전투 전쟁기념관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Proclamation No. 84 · 주필리핀 대한민국 대사관: 대사관 휴무일 안내 (4.9-4.10) · RTVMalacanang: 82nd Anniversary of the Araw ng Kagitingan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유적지: 비간의 일로코스 박물관 단지 - 바씨 갤러리(Basi Gallery)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유적지: 비간의 일로코스 박물관 단지 - 바씨 갤러리(Basi Gallery)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10월 14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1807년에 일로코스 지에서 일어났었던 바씨 반란(Basi Revolt) 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필리핀 비간 시티(City of Vigan)에 있는 일로코스 박물관 단지(Ilocos Regional Museum Complex) 에 가면 된다. 바씨 반란과 관련된 14점의 유화를 통해 바씨 반란 때 어린 일이 발생했는지를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그림은 비간 출신의 화가인 에스테반 빌라누에바(Esteban Pichay Villanueva)의 작품으로 1821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바씨 반란의 과정을 시리즈로 만들어 표현한 유일한 작품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14점의 그림 시리즈 모두 2009년에 국가 문화재(National Cultural Treasures)로 지정되었다. 필리핀국립박물관에서는 일로코스 지역 전통술인 바씨(Basi)에 대한 전시실도 함께 운영하고 있어 바씨를 만들 때 쓰던 전통 도구와 함께 파타얀(Tapayan) 토기를 볼 수 있다. 일로코스 지방 박물관 단지 Ilocos Regional Museum Complex ■ 주소: Ilocos Regional Museum Complex, Burgos Street, Vigan City, Ilocos Sur ■ 위치: 필리핀 비간 / 일로코스주 의사당(provincial capitol building) 근처 ■ 운영시간: 오전 9시~오후 5시 / 월요일 휴관 ■ 입장료: 무료 일로코스 박물관 단지(Ilocos Regional Museum Complex) 바씨 갤러리(Basi Gallery) 바씨 갤러리(Basi Gallery) 바씨를 만들 때 쓰던 전통 도구 파타얀(Tapayan) 토기 파타얀(Tapayan) 토기 파타얀(Tapayan) 토기 스페인 식민지 시대 일로코스에서 일어났던 바씨 반란(Basi Revolt)에 대한 전시실 바씨 반란과 관련된 14점의 그림 시리즈 바씨 반란과 관련된 그림을 통해 바씨 반란의 모습을 좀 더 생생하게 볼 수 있다.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National Museum of the Philippines: The Basi Revolt · National Museum of the Philippines: Basi Gallery · National Museum of the Philippines: National Museum of the Philippines – Ilocos · Manila Bulletin: National Museum launches virtual edition of 'The Basi Revolt'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항공산업의 역사: 1948년, 닐슨공항 이전과 마카티 시티의 개발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항공산업의 역사: 1948년, 닐슨공항 이전과 마카티 시티의 개발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9월 1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Makati, Ayala Triangle Gardens 1945년의 1월, 전쟁은 도무지 그 끝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루손섬에서는 전투가 계속되었고, 민다나오섬을 비롯한 다른 섬에서의 저항도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힘겨웠던 시절도 끝이라는 것이 있었다. 1945년 9월 2일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 약 3천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 희생자 수를 기록해야만 했던 가혹한 전쟁이었다. 하지만 삶은 전쟁 이전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마닐라는 폐허가 되어 있었으니, 모두가 힘을 모아 도시 재건을 외쳐야만 했다. 공항 이전과 마카티 시티의 개발 아얄라 가문은 말라떼와 에르미타 등 마닐라 도심 지역이 완전히 파괴된 것을 보고 새롭게 마닐라 도심에 주택가와 금융센터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아얄라 가문에서 마카티를 상업지구로 만들 계획을 세우던 중에 닐스 필드 에어포트(Nielson Field airport)가 미군 비행장이었던 니콜스 필드(Nichols Field)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그리고 닐슨 공항이 니콜스 필드로 이전함에 따라 아얄라 트라이앵글 주변의 토지가 다시 아얄라로 반환 되었다. 아얄라에서는 제어탑(Nielson Tower)과 여객터미널 시설만 제외하고 공항 시설의 대부분을 마카티 시티의 개발에 활용 하기로 하는데, 공항 활주로 중 기본 활주로는 현재의 아얄라 애비뉴(Ayala Avenue) 도로로, 보조 활주로는 현재의 파세오 데 로하스(Paseo de Roxas) 도로로 전환되는 식이었다. 비즈니스 및 상업 지구로서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게 된 것이다. 무척이나 많은 변화가 한꺼번에 일어났던 시기였다. 필리핀의 제5대 대통령이었던 마누엘 로하스(Manuel Acuna Roxas) 대통령은 1946년부터 1948년까지 그의 재임 기간 중 전후 복구 사업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공항에 대한 복구도 잊지 않았다. 로하스 대통령은 닐슨 공항을 대신할 새로운 공항 건설을 명령하였고, 1948년에 마닐라공항은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된다. 마카티를 떠나 지금 마닐라공항의 자리로 공항을 옮기게 된 것이다. 파라냐케와 파사이 시티 사이 경계선 쪽이 신공항 후보지로 거론된 것은 공항 활주로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부지를 마련할 수 있으며, 지형이 평평하여 비행기가 이·착륙하기에 적당하다는 이유였다. 당시만 해도 70여 년이 흐른 뒤 마닐라공항이 '최악의 공항'이라고 불릴 정도로 혼잡해지리라는 것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𖠿 관련 글 보기: 필리핀 항공산업의 역사: 1935년, 필리핀 최초의 상업용 공항 개항 필리핀 항공산업의 역사: 1937년, 마카티 닐슨공항이 문을 열다 필리핀 항공산업의 역사: 1941년, 필리핀항공은 왜 바기오 노선부터 상업 비행을 시작했을까? 마닐라 마카티. 아얄라 트라이앵글 공원 지역. 예전에 공항이 있었다는 흔적은 관제탑 건물(블랙 버드 레스토랑)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 1949년도에 그려진 마닐라공항 스케치 (출처 : http://www.lougopal.com/manila/ ) 아얄라 트라이앵글 가든 - Makati, Ayala Triangle Gardens Makati, Ayala Tower One Makati, Ayala Tower One Makati, Insular Life - Ayala Avenue Makati, Teleperformance Center Ayala Makati, Teleperformance Center Ayala 필리핀 마닐라 마카티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Filipinas Heritage Library https://www.filipinaslibrary.org.ph/ · Blackbird Restaurant 공식 홈페이지 http://www.blackbird.com.ph · Philippine History and Architecture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Philippine-History-and-Architecture-111131982293260/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사람들은 왜 산토니뇨 아기 예수상에게 기적의 힘이 있다고 믿게 되었을까?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필리핀 사람들은 왜 산토니뇨 아기 예수상에게 기적의 힘이 있다고 믿게 되었을까?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9월 26일 산토니뇨 아기 예수상 필리핀 사람들은 왜 산토니뇨(Santo Niño) 아기 예수상에 기적의 힘이 있다고 믿게 되었을까? 산토니뇨의 기원은 무려 마젤란 시대로 올라간다. 필리핀 역사에 따르면 포르투갈 출신의 항해가 페르디난드 마젤란 이 필리핀에 도착한 것은 1521년 3월 16일이라고 전해진다. 조선에서는 중종(1488~1544)이 신진사림의 핵심 인물들을 몰아내어 기묘사화를 일으켰던 그해, 에스파냐(스페인)의 국왕 카를 5세 의 후원으로 5척의 배와 270명으로 된 선단을 이끌고 스페인에서 출발한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대서양을 횡단하여 필리핀에 도착했다. 하지만 마젤란의 항해는 쉽지 않았다. 거친 바다 위에서 극한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1519년에 에스파냐에서 출발한 마젤란은 1521년이 되어서야 필리핀에 도착했는데, 침략과 선교를 동시에 하던 당시 스페인의 방식에 따라 열심히 원주민에게 신앙을 전파하며 개종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세부섬 토착 왕국의 통치자(Rajah)였던 라자 후마본(Rajah Humabon)과 손을 잡고, 후마본의 정적이었던 막탄섬 지도자 라푸라푸(Lapu-Lapu)를 죽이겠다고 약속함으로써 필리핀에서의 지지 세력을 다져나갔다. 덕분에 라자 후마본은 필리핀에서 최초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으며, 신하 800명까지 세례를 받게 되었다. 마젤란은 라자 후마본의 아내인 하라 아미한(Hara Amihan, 후에 후아나)에게 산토 니뇨 성상을 선물하기도 하고 제법 잘 지내는 듯 보였지만, 라푸라푸를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전투에 임하다가 막탄전투(Battle of Mactan) 에 전사하게 되었다. 당시 후아나 여왕에게 아기 예수상의 모습이 어떻게 보였을지는 모르겠지만, 마젤란이 죽고 스페인 원정대가 필리핀에서 철수하였던 동안 필리핀 최초의 가톨릭 신자들은 아기 예수상을 그들의 신앙의 중심으로 모셨다. 막탄 전투에서 살아남은 마젤란의 부하들은 남은 배 한 척을 이끌고 스페인으로 돌아가 필리핀에 도착했었으며 마젤란은 죽었지만 그래도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세계 일주를 완성했음을 왕에게 보고했지만 스페인의 왕이 먼 동양의 나라까지 다시 원정을 보낼지 결정하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다가 마젤란이 죽고 40여 년의 시간이 훌쩍 지난 1565년,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 가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 의 지원을 받아 필리핀 원정에 나섰다. 마젤란과 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던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는 세부에 도착하자마자 마을을 포격했다. 그런데 불에 타서 무너진 오두막에서 기적적으로 손상되지 않은 산토니뇨(아기 예수상)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날 원주민들은 불탄 오두막 속에서도 남아있던 아기 예수상을 위해 북소리에 맞춰 춤을 추었는데, 이것이 세부 시눌룩 축제(Sinulog Festival) 의 기원이라고 한다. 시눌룩 축제가 생겨나기 전에도 세부 지역의 원주민은 북소리에 맞춰 영적 존재를 기리는 춤을 추었다고는 하지만, 후세 사람들이 지금처럼 비바 산토니뇨(Viva El Sto. Niño)를 격렬하게 외치게 되리라고는 짐작조차 못 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사건 이후 필리핀 사람들은 산토니뇨를 기적과 신앙의 상징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 이야기는 모두 아는 바대로이다.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는 세부를 점령했지만 향신료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부하들을 마닐라로 보내 정복하도록 했다. 1571년, 레가스피는 마닐라로 올라와 필리핀 제도는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선언한 뒤 필리핀의 초대 총독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필리핀은 1571년부터 1898년까지 긴 시간 동안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어야 했다. 𖠿 관련 글 보기: 필리핀 축제: 마닐라에서 산토 니뇨를 외치다 - 톤도 락바야 페스티벌(Lakbayaw Festival) 산토니뇨 아기 예수상 필리핀 톤도 락바야 페스티벌 Lakbayaw Festival 필리핀 톤도 락바야 페스티벌 Lakbayaw Festival 비바 산토니뇨(Viva El Sto. Niño)!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Aleteia: How the Santo Niño became the Philippines’ most popular devotion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와 카를로스 1세(카를 5세)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와 카를로스 1세(카를 5세)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2월 28일 마닐라 마카티의 아얄라 박물관(Ayala Museum)에 전시된 범선의 모형 업무 스트레스가 상당히 심하다는 자리가 왕의 자리이다. 그런 왕의 자리에서 일만 아는 일벌레로 살면 장수하기 힘들 것 같지만, 오스트리아의 왕실을 거의 600년 동안 지배하였다는 합스부르크가 왕가 출신의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는 고희의 나이까지 살았다. 당시 평균 수명으로 보았을 때는 상당히 장수한 셈이다. 펠리페 2세(Felipe II) 펠리페 2세 Felipe II 1527년 3월 21일 출생~ 1598년 9월 13일 사망 스페인 최전성기의 스페인 국왕 필리핀의 국명은 펠리페 2세에서 유래함 펠리페 2세는 조선에서 연산군의 뒤를 이어 중종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시기(1527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선조 31년(1598년)에 죽었는데 왕위를 물려주기 전까지 거의 궁정에 틀어박힌 채 서류 정리에 집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의 최강국 에스파냐(영어식 국명은 스페인)가 해가 지는 국가가 되어 버린 원인 중 하나로 펠리페 2세가 종교 전쟁을 위한 서류에 마구 서명했다는 것을 꼽을 정도이다. 펠리페 2세는 1556년에 아버지 카를 5세(카를로스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1598년 죽기 전까지 에스파냐 왕으로 재위했는데, 그가 통치했을 당시 에스파냐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릴 만큼 황금시대를 보낼 수 있었다. 독실한 가톨릭교도였던 펠리페 2세는 로마 가톨릭을 통한 국가 통합을 추구하였는데, 하루 14시간 이상을 집무실에서 보낼 정도로 성실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성실한 왕에게서 5척의 배를 지원받아 원정을 떠난 이가 바로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 이다. 1565년 필리핀에 도착한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Miguel Lopez de Legazpi, 1502년~1572년)는 세부 지역을 기반으로 필리핀 정복에 나섰다. 하지만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는 1571년이 되어서야 펠리페 2세에게 필리핀을 정복했다고 보고할 수 있었다. 하지만 7개의 바다를 지배하며 에스파냐의 황금시대를 이끈 절대군주라고 해도 암을 이길 수는 없었다. 펠리페 2세는 동남아시아에 있는 7천 개의 섬나라를 식민지로 삼아서 필리핀(Philippines) 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한 뒤 엘 에스코리알 궁전에서 사망했다. 카를 5세(Karl V) 카를 5세 Karl V(Charles V) 스페인에서의 명칭은 카를로스 1세( Carlos I) 1500년 2월 24일 출생~1558년 9월 21일 사망 ‘해가 지지 않는 해양제국’ 스페인의 통치자 에스파냐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카를로스 1세)는 1500년에 태어나 1558년 사망했다. 중세 유럽에서 가장 많은 국가의 왕관을 쓴 인물로 평가되는 카를 5세는 무려 17개나 되는 왕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근친결혼이 불러오는 유전적 결함을 이야기할 때 꼭 거론되는 이 왕은 합스부르크 왕가 가문 특유의 유전병인 주걱턱 현상으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하는데, 말년에는 심한 통풍으로도 고생했다고 한다. 카를 5세는 성인이 되기도 전인 1516년에 에스파냐 국왕의 자리에 올랐는데, 1556년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카를 5세가 가졌던 신성로마제국의 왕위는 동생인 페르디난드 1세에게 주어졌지만, 에스파냐의 왕위는 아들이었던 펠리페 2세(Felipe II)가 물려받았다. 필리핀 국기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National Quincentennial Committee: Philippines First Circumnavigation Map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5페소 지폐와 캠프 아기날도까지,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흔적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5페소 지폐와 캠프 아기날도까지,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흔적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9월 23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필리핀 생활을 하다 보면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좋든 싫든 그의 흔적을 수시로 볼 수 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필리핀 국기를 도안했으니 말이다. 필리핀 국가인 루팡 히니랑(Lupang Hinirang) 역시 그가 1898년 6월 12일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했을 때 훌리안 펠리페(Julian Felipe)에게 의뢰하여 만들었던 필리핀 국가 행진곡(Marcha Nacional Filipina)에서 유래한다. 화폐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그의 카비테 자택(스페인으로부터 독립선언을 했던 장소)은 1985년에 발행되었던 구권 5페소 지폐 도안으로 채택되었었다. 이 5페소 지폐는 현재 사용되지 않는다. 지명 - 필리핀군(AFP)의 총사령부가 있는 곳은 퀘존의 캠프 아기날도(Camp Aguinaldo)이다. 이곳은 원래 캠프 머피(Camp Murphy)라고 불렀지만, 1965년 서명된 공화국법 제4434호(REPUBLIC ACT No. 4434)에 따라 CGEA(Camp General Emilio Aguinaldo)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 카비테의 카윗에 가면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이름을 가진 '제너럴 에밀리오 아기날도'라는 이름의 동네가 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생가는 이 지역과 꽤 떨어져 있지만, 바일렌(Bailen)에서는 1965년 6월 19일 제너럴 에밀리오 아기날도(Municipality of General Emilio Aguinaldo)로 행정구역의 이름을 바꾸었다. 유적지 - 카비떼의 카윗(Kawit)에 가면 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Aguinaldo Shrine and Museum)을 관람할 수 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생가를 박물관으로 개조한 곳으로 이곳에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무덤도 있다. - 1898년도에 필리핀 제헌의회가 열렸던 불라칸 말로로스에 있는 바라소아인 성당(Barasoain Church)에 가면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관련된 자료가 가득한 1899년 공화국 박물관(Museo ng Republika ng 1899)을 관람할 수 있다. 𖠿 관련 글 보기 필리핀 역사: 친일파가 되었던 독립운동가, 필리핀의 제1대 대통령 에밀리오 아기날도 필리핀 역사 유적지: 불라칸 말로로스의 바라소아인 성당과 필리핀 제1공화국 박물관 필리핀 역사 유적지: 스페인로부터의 독립 선언을 했던 장소, 카비테의 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 카비테 카윗의 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Aguinaldo Shrine and Museum) 필리핀 말라카냥궁(Malacanang Palace)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REPUBLIC ACT No. 4434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따가이따이 맛집: 따알호수 근처, 탐앤탐스 커피 블랙
필리핀 맛집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맛집 필리핀 따가이따이 맛집: 따알호수 근처, 탐앤탐스 커피 블랙 ⚝ 저작권 안내 :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7월 28일 주차장에서 멀리 따알호수의 풍경을 볼 수 있다. 따가이따이에는 따알호수 주변으로 멋진 카페가 가득하지만, 장사가 잘되는 집이 얼마나 많을지는 알 수 없다. 스타벅스가 가장 손님이 많은 것은 거의 확실하지만, 2위는 글쎄, 어디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일요일이라 따가이따이(Tagaytay)에 드라이브를 나갔다가 탐앤탐스 커피 블랙(Tom N Toms Coffee Black) 에 방문했다. 따가이따이의 커피숍하면 스타벅스가 독보적인 인기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미 여러 번 가본 터라 매우 짐작이 가능한 풍경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올티가스 탐앤탐스의 단골답게 새로 문을 연 탐앤탐스에 가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지난 2024년 7월 13일에 문을 열었다는 따가이따이 탐앤탐스는 내게 딱 한 가지만 만족시켜 주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내 일요일 아침을 짐작 가능한 시간으로 채우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시 이곳 매장에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저희 아직 오픈 전인데요..." 가장 손님이 많을 일요일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매장은 아직 문을 열지 않고 있었다. 매장 바깥에 영업시간에 대한 안내문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만, 직원이 9시는 되어야 커피숍의 문을 연다고 했다. 그냥 돌아서려는데 직원이 아메리카노처럼 간단한 음료와 빵은 주문할 수 있다고 알려 왔다. 이곳 탐앤탐스는 호텔 조식 메뉴 비슷하게 식사에 가까운 메뉴도 많이 팔지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서 식빵으로 만드는 시나몬 브레드와 허니넛 브레드 두 가지만 주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메뉴판을 볼 수고를 할 필요도 없이 아메리카노 두 잔과 시나몬 브레드를 주문했다. 문제는 계산대에서 시작되었다. 가끔 친절하지만 큰 도움을 주지는 못하는 직원을 보게 되는데, 이곳 탐앤탐스 직원이 그런 타입의 사람이었다. 665페소가 나왔기에 천 페소를 내밀었더니 잔돈이 전혀 없다고 했다. 카드나 지캐시는 사용이 안 되고 현금만 받는 것이야 매장 정책이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거스름돈을 줄 잔돈 335페소가 없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근 문을 열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뭔가 매장 내 특별한 상황이 있는 것인지 그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잔돈이 없으니 정확한 금액을 가지고 와야 주문을 도와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왔다. 하지만 내 지갑에 665페소가 딱 맞추어 들어 있을 리가 만무하다. 결국 지갑을 뒤져 500페소를 찾아낸 뒤 커피 한 잔과 브레드 하나로 정확히 500페소를 만든 뒤에야 가까스로 주문을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매장 오픈 시간 전임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손님이 오가는 상황에서 직원이 흡사 속옷처럼 보이는 흰색 민소매 옷을 입고 커피머신을 만지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심각하게 느린 서빙 속도였다.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에 시나몬 브레드 하나 주는 것에 20분 이상 걸릴 일인지 모르지만, 한참이나 기다려도 커피는 나오지 않았다. 그럭저럭 간신히 커피를 받아 들고 165페소나 주기는 아까운 맛이란 생각을 하면서 마시는데 다른 손님이 속속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직 9시가 되려면 한참 남았는데, 이렇게 주문을 계속 받을 것이라면 매장 오픈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매장 문을 연 지 고작 보름밖에 되지 않아서 뭔가 정리가 덜 된 모양이었다. 어쨌든 한 가지만은 확실했으니, 나 외에는 모두 잔돈을 넉넉히 들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Tom N Toms Coffee Black Tom N Toms Coffee Black 탐앤탐스 커피 블랙 ■ 위치: 필리핀 따가이따이, Ayala Malls-Serin 근처 ■ 주소: Tom N Toms Coffee, Silang Junction North Tagaytay City ⚝ 매장 방문 횟수: 1회(재방문 의사 없음) Tom N Toms Coffee Black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에 적힌 글은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으며,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업체 사정에 의해 영업 여부 및 메뉴 등이 변동되었을 수도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1983년, 마닐라공항에서 베니그노 아키노 2세(니노이 아키노) 사망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1983년, 마닐라공항에서 베니그노 아키노 2세(니노이 아키노) 사망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9월 15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필리핀에서 민주화 운동을 이야기하면서 니노이 아키노(베니그노 아키노 2세) 를 빼놓기란 대단히 어렵다. 필리핀의 제11대 대통령인 코리 아키노(코라손 아키노)의 남편이자, 제15대 대통령인 노이노이 아키노(베니그노 아키노 3세) 대통령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는 필리핀 민주주의 운동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니노이 아키노는 감옥에서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을 하면서까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독재 정권에게 저항했지만, 마르코스의 독재는 멈추지 않았다. 1980년에 니노이 아키노는 심장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가야만 했는데, 1983년 8월 21일 조국 필리핀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닐라 공항에서 암살당했다. 하지만 그의 희생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니노이 아키노의 죽음 이후 필리핀 민주화 운동이 드디어 열매를 맺었으니 하는 이야기이다. 베니그노 아키노 2세 니노이 아키노 베니그노 시미온 니노이 아키노 주니어 · 본명: Benigno "Ninoy" Simeon Aquino Jr. · 1932년 11월 27일 출생~1983년 8월 21일 사망 · 필리핀 민주화 운동의 주역 1932년 11월 27일의 일이다. 앙헬레스 위쪽에 있는 딸락(Tarlac)의 컨셉션(Concepcion)에서 아이가 하나 태어났다. 부유한 정치가 가문으로 유명했던 아키노 가문의 귀한 아들이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 대통령의 혁명군 장군이었던 할아버지와 KALIBAPI 정당의 사무총장이었던 아버지(베니그노 아퀴노 시니어) 아래에서 아이의 유년 시절은 즐겁게 지나갔다. 하지만 아이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전 세계가 열병과 같은 전쟁으로 뜨겁던 때였다. 아이는 아테네오 대학(Ateneo de Manila University)을 다니고 있었지만, 학교를 그만두고 세상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열일곱의 나이였지만, '마닐라 타임즈' 신문사에 취직하여 최연소 종군기사로 한국 전쟁에 대한 기사를 썼다. 그는 대통령상을 받을 정도로 기자로서의 재능을 보였지만, 신문사를 그만두고 정치에 뛰어든다. 그리고 정치 명문가 출신답게 곧 화려한 정치 기록을 세운다. 1955년 선거에 나가 불과 22살의 나이에 고향인 딸락 주의 콘셉시온(Municipality of Concepcion)의 시장으로 당선된 것이다. 그리고 27세엔 부지사, 29세엔 도지사, 34세엔 상원의원으로 선출되면서 계속하여 최연소 당선 기록을 세웠다. 정치 혼란기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빠르게 정치판에 입문하게 된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독재자 마르코스 대통령에게는 자신의 정권에 대한 끊임없는 비평을 일삼던 젊은 정치인은 눈엣가시에 불과했다. 마르코스 대통령의 정치적 탄압이 시작되었고, 결국 그는 50세의 나이에 암살당하게 된다. 필리핀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에게 저항하며 수없이 많은 일화를 남긴 남자, 이 남자의 이름은 바로 니노이 아키노(베니그노 아키노 2세)다. 니노이 아키노(베니그노 아키노 2세) 필리핀 민주화 운동 1972년 9월 21일의 일이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마저 탄압하는 유례없는 폭정이 시작된 것이다. 마르코스는 계엄령 선포와 함께 니노이 아키노를 체포하는데, 살인 및 불법 총기 소지가 체포 혐의였다. 니노이 아키노는 무려 7년간 감옥에 수감되게 되지만 감옥 안에서도 마르코스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40여 일이 넘는 목숨을 건 단식 투쟁으로 부정 선거에 항의했는데, 1975년에 이르러 굶주림으로 아사 직전에 직면했음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아키노에 대한 재판은 계속되었고, 1977년에 군사위원회에서는 니노이 아키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게 된다. 하지만 다음 해에 아키노는 감옥에서 필리핀 의회 선거 출마까지 감행하게 된다. 니노이 아키노는 1978년 선거에서 패했지만, 선거 후 사형선고는 취소된다. 1980년의 3월은 니노이 아키노에게 더욱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니노이 아키노는 감옥에서 심장 발작을 일으켰는데, 병원(Philippine Heart Center)으로 이송되었지만 수술을 받기란 쉽지 않았다. 의료진 측에서 수술에 대한 부담으로 진료를 꺼린 것이다. 니노이 아키노 입장에서도 마르코스가 어떤 술책을 쓸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니노이 아키노는 마르코스에게 심장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갈 수 있게 되기를 청했고, 마르코스는 자신의 정권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니노이 아키노의 출국을 허락한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아키노는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망명을 하게 되는데, 병원 치료를 받으면서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집회 참석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마르코스와의 약속에 대해 "악마와 맺은 약속은 약속으로 볼 수 없다(a pact with the devil is no pact at all)"고 하면서 필리핀의 민주화를 위한 강연과 연설을 멈추지 않았다. 니노이 아키노(베니그노 아키노 2세) 우리가 가진 적이 없는 가장 위대한 대통령 1983년 8월, 여의도에 6.25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만남의 광장' 만들어졌다고 대한민국이 들썩이던 그때 필리핀 역사에 있어 지울 수 없는 큰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니노이 아키노는 미국에 있었지만, 조국인 필리핀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당시 그는 자신이 필리핀 땅을 밟는 순간 감옥에 투옥되거나 살해당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키노는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리고 1983년 8월 21일, 니노이 아키노는 귀국 길에 공항에서 암살당한다. 마르코스 정부에서 파견한 경호원이 지켜보고 가운데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저격범이 쏜 총알에 머리를 맞아 사망하게 된 것이다. 니노이 아키노가 마닐라공항에서 암살당했다는 소문은 빠르게 필리핀 국민들에게 퍼졌다. 당시 마르코스 정부는 암살범과의 연관성을 부인했으나 어린아이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리고 니노이 아키노의 죽음으로 필리핀은 대혼란으로 빠졌다. 아키노의 묘소는 퀘존 시티에 있던 그의 집에서 마련되었는데, 아키노의 가족들은 아키노의 총상 자국을 숨기지 않았다. 장례식이 있는 8월 31일까지 아흐레 동안 수천 명의 사람이 아키노의 피 묻은 몸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무더운 공기가 가득 차 있던 그해, 니노이 아키노의 장례식이 있었던 8월 31일은 유난히 무덥고 습기가 높았다고 전해진다. 퀘존의 산토 도밍고 교회(Santo Domingo Church)에서 있었던 아키노의 장례식을 보고자 2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애석하게 죽은 고인을 추모하며 사람들은 퀘존에서부터 리잘 공원까지 행진했고, 마르코스를 규탄하며 독재 정부의 퇴진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 일은 필리핀 민주화의 시발점 이 됐다. 하지만 정치적 혼란은 사라지지 않았고, 필리핀 민주화운동이 갈 길은 멀기만 했다. 그가 암살당하고 난 뒤에도 3년이나 지나서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21년 동안의 장기독재를 접고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𖠿 관련 글 보기 필리핀 역사: 1986년, 마르코스의 독재를 몰아낸 피플 파워 혁명(EDSA 혁명) 필리핀 역사: 피플파워혁명 이후 필리핀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된 코리 아키노(코라손 아키노) 비행기에서 내리기 직전 아키노의 모습(좌) 총탄에 쓰러진 모습(우) - 사진 출처: Presidential Museum and Library PH 니노이 아키노 암살 당시의 기록 (출처 : Mr & Ms, American Historical Collection, Rizal Library, Ateneo de Manila University ) 니노이 아키노 장례식. 그를 추모하려고 몰려든 사람들 (이미지 출처 : Presidential Museum and Library ) 필리핀 마닐라공항 터미널1. 니노이 아키노가 암살당한 곳은 터미널1의 11번 게이트 주변이라고 한다. 니노이 아키노의 죽음은 민중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마닐라공항의 정식 이름은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이다. 필리핀 정부에서는 필리핀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였던 니노이 아키노를 기리기 위해 '마닐라공항'의 이름을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으로 바꾸었다. 마닐라 마카티에 있는 니노이 아키노 기념 동상. 아키노가 마닐라공항에 도착한 직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동상은 아얄라 트라이앵글 공원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다. Ayala Avenue와 Paseo de Roxas 모퉁이에 있다. 니노이 아키노와 그의 부인 코리 아키노. 코리 아키노는 이후 필리핀의 대통령이 되었다. 필리핀 정부에서는 그가 암살당한 8월 21일을 공휴일(Ninoy Aquino Day)로 삼고 있다. EDSA 피플 파워 혁명 기념조형물(EDSA People Power Monument)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Malacañang Palace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잔인한 4월,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잔인한 4월,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9월 27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을 묘사한 디오라마 - 야얄라 뮤지엄(Ayala Museum) 소장품 바탄 죽음의 행진 Bataan Death March 1942년 4월 9일 ~ 1942년 4월 17일 바탄 전투(Battle of Bataan) 가 끝난 뒤 필리핀인 66,000명과 미국인 10,000명이 일본의 전쟁포로가 되었다. 7만 명이 넘는 전쟁포로가 나올 것을 예상하지 못한 일본에서는 딸락 카파스에 있는 캠프 오도넬(Camp O'Donnell)을 포로수용소로 사용하기로 한다. 그리고 약 76,000명에 달하는 전쟁포로를 포로수용소까지 걸어서 이동하도록 했다. 바탄에서 딸락의 캠프 오도넬의 수용소까지 대체 몇 km를 걸었는지와 이동 중 몇 명이나 되는 이가 목숨을 잃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마리벨레스(Mariveles)에서 Orion, Balanga, Orani, Layac, Guaga를 지나 팜팡가의 산페르난도(San Fernando)까지, 그리고 카파스(Capas)에서 캠프 오도넬까지 대략 100km를 걸었으리라 생각될 뿐이다. 그리고 견디기 힘든 이 잔혹한 행군에서 최소 1만 명이 굶주림과 탈진, 말라리아 감염으로 사망 했으리라 추측된다. 필리핀에서 4월은 가장 덥다는 계절이 된다. 전쟁포로가 된 사람들은 4월의 숨 막히는 더위 속에서 100km 넘는 거리에 있는 포로수용소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식량은 고사하고 물조차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길을 걷는 동안 일본군은 잔혹한 가혹행위를 계속했다. 질병과 탈수로 지친 포로를 구타하고, 대열을 이탈한 낙오자는 총검으로 살해했다. 바탄 반도 끝의 마리벨레스에서 산페르난도까지 약 88km를 도보 이동한 뒤에 산페르난도에서 카파스(Capas)까지는 열차를 이용하게 했다고 하지만 박스카(Boxcar) 열차가 휴식이 되지는 못했다. 물도 마시지 못하는 상황에서 의자는 바라지도 않았겠지만, 4월의 햇살 속에서 뜨겁게 달아오른 열차는 그 자체가 고문이었다. 그리고 카파스에 도착한 뒤에는 캠프 오도델까지는 다시 약 13km의 악몽 같은 도보 행군이 이어졌다. 그런데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을 마치고 캠프 오도넬에 도착한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전혀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열악한 환경의 포로수용소였다. 캠프 오도넬의 포로수용소는 만 명 규모의 수용 인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본군은 약 54,000명의 인원을 한꺼번에 수용소에 집어넣고 학대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굶주림과 질병, 포로 학대 등으로 매일 수백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결국 1943년 1월 캠프 오도넬이 폐쇄될 때까지 오도넬 수용소의 포로는 절반 가까이 사망했다. 1942년의 그곳은 포로수용소라기보다는 지옥이었다. 한편, 일본군은 캠프 오도넬을 폐쇄한 뒤 포로들을 누에바에시하의 카바나투안 포로수용소로 이동시켜 포로 생활을 하게 했다. 포로로 잡힌 이들 상당수는 다른 수용소로 분산되어 수용되었지만, 포로 학대는 계속되었다. 수용소를 옮기는 과정에서도 사망자가 속출했지만, 전후 일본은 전범 재판에 나와 포로가 죽을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𖠿 관련 글 보기 필리핀 역사: 1942년, 바탄 반도를 피로 물들인 바탄 전투(Battle of Bataan) 필리핀 역사 유적지: 바탄 죽음의 행진과 사맛산 십자가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 .pdf PDF 다운로드 • 549KB 바탄 죽음의 행진 표지석 바탄 죽음의 행진 표지석 바탄 죽음의 행진 표지석 바탄 죽음의 행진 표지석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The National WWII Museum: Battle of Bataan · The National WWII Museum: Bataan Death March Survivor Lester Tenney Dies at Age 96 · National Museum of the U.S. Air Force: Imperial Brutality: Bataan Death March · National Museum of the U.S. Air Force: Bataan Death March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Bataan Death March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