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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리핀 공휴일의 의미와 유래: 필리핀 독립기념일이 7월 4일이 아닌 6월 12일이 된 이유

    필리핀 공휴일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공휴일 필리핀 공휴일의 의미와 유래: 필리핀 독립기념일이 7월 4일이 아닌 6월 12일이 된 이유 ⚝ 저작권 안내 :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9월 21일 카비테 카윗의 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Aguinaldo Shrine and Museum).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던 장소이다. 매년 6월 12일은 필리핀 독립기념일(Independence Day) 로 공휴일이다. 하지만 필리핀은 1946년 7월 4일 미국으로부터 독립했다. 그렇다면 왜 필리핀은 6월 12일을 독립기념일로 삼고 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가 고향인 카비테 카윗의 집에서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한 1898년 6월 12일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비록 그날 필리핀이 실질적인 독립을 한 것은 아니지만, 필리핀 정부에서는 1898년을 기준으로 독립 관련 행사를 하고 있으며, 에밀리오 아기날도를 필리핀의 제1대 대통령으로 삼고 있다. 독립기념일 기념행사 역시 미국으로부터 독립했던 날이 아닌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던 1898년 6월 12일을 기준으로 진행된다. 그러니까 올해(2024년) 필리핀 정부에서 독립 126주년 기념행사를 한 것도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했던 1898년 6월 12일부터 독립기념일을 헤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닐라의 퀴리노 그랜드스탠드(Quirino Grandstand) 광장이 아니라 카비테 카윗에 있는 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에 가야 필리핀 정부에서는 진행하는 독립기념일 행사를 볼 수 있다. 행사 프로그램은 해마다 조금씩 달라지지만, 필리핀 국기를 게양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것으로 독립기념일을 기념한다. 참고로 필리핀 독립기념일은 정규휴일(Regular Holiday)로 유급휴일 이다. 𖠿 관련 글 보기 필리핀 역사: 1898년 6월 12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선언(필리핀 독립기념일) 필리핀 역사 유적지: 스페인로부터의 독립 선언을 했던 장소, 카비테의 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 필리핀 독립기념일 Independence Day 공휴일 날짜: 매년 6월 12일 필리핀 역사책을 보면 "필리핀의 독립기념일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다양한 날을 기념해 왔다."고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괴상한 설명에 대한 이유는 알고 보면 간단하다. 1962년도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으로부터 독립한 날을 기준으로 7월 4일을 독립기념일로 지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대통령 시절부터 필리핀 독립기념일(Independence Day)의 공휴일 날짜가 오늘날과 같은 6월 12일로 바뀌었다. 필리핀의 독립을 국내외에 선언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1964년 이전에는 6월 12일이 국기의 날(National Flag Days) 로 기념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필리핀 국기가 처음 사용된 것은 1898년 5월 28일 알라판 전투(Alapan battle)에서였던 터라 ' 국기의 날'을 5월 28일로 변경하고 6월 12일은 '독립기념일'로 삼은 것이다. 미국으로부터 독립한 7월 4일은 '필리핀 공화국 기념일(Philippine Republic Day)'이란 명칭을 얻었다. 필리핀의 독립기념일의 날짜 변경은 1964년 8월 4일 승인된 공화국법 제4166호(Republic Act No. 4166)를 근거로 한다. · 1898년 6월 12일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고향인 카비테(Cavite)의 집에서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했으나, 이 독립 선언으로 필리핀이 독립국이 되었다고 국제적인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 필리핀은 1946년 7월 4일 미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음을 기념하기 위해 6월 12일을 독립기념일(Independence Day)로 삼고 있다. · 독립 후 첫 대통령은 마누엘 로하스이다. 필리핀의 제5대 대통령인 마누엘 로하스는 필리핀 대통령 취임 후 필리핀 독립을 정식으로 선포했다. 필리핀 정부에서는 1898년 6월 12일부터 독립기념일을 헤아리고 있다. 필리핀 국기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Republic Act No. 4166 · National Library of the Philippines: 126th celebration of Philippine Independence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공휴일: 니노이 아키노 데이, 8월 21일에서 8월 23일로 변경

    필리핀 공휴일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공휴일 필리핀 공휴일: 니노이 아키노 데이, 8월 21일에서 8월 23일로 변경 ⚝ 저작권 안내 :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8월 15일 마닐라공항 터미널1 출발층에 있는 니노이 아키노 기념비 좀 어이가 없기는 하지만, 필리핀 대통령궁(말라카냥)의 발표에 따르면 올해 2014년의 니노이 아키노 데이(Ninoy Aquino Day) 공휴일이 8월 21일 수요일에서 8월 23일 금요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필리핀 친구가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을 놓고 '미스터 공휴일'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주말을 끼고 긴 연휴를 만들기 위해 지정된 공휴일의 날짜를 옮길 생각을 힌다니 참으로 필리핀답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일이 다소 어이가 없게 느껴지는 것은, 니노이 아키노 데이는 봉봉 마르코스의 아버지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에 의해 마닐라공항에서 암살당한 베니그노 시메온 니노이 아키노 주니어(Benigno Simeon Ninoy Aquino Jr.) 를 기리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 공휴일이 8월 21일이 된 것도 니노이 아키노가 마닐라공항에서 죽은 날이 바로 1983년 8월 21일이기 때문이다. 긴 이야기를 짧게 요약해 보자면, 니노이 아키노의 죽음은 필리핀 민주화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1986년 2월 피플파워라고 부르는 에드사 혁명(EDSA Revolution)이 일어나면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황급히 대통령직을 내놓고 사치의 여왕이라는 이멜다 마르코스와 함께 하와이로 망명해야만 했다. 마르코스 독재 정부가 21년간 장기 집권을 끝내고 퇴진한 뒤 필리핀 대통령 자리를 차지한 것이 바로 니노이 아키노의 부인이었던 코라손 아키노(코리 아키노)인데, 코리 아키노의 집권 후 필리핀에서는 대통령의 임기를 6년 단임제로 제한하게 된다. 이 길고 아픈 필리핀 역사의 이야기는 모두 현직 대통령인 봉봉 마르코스가 청년이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그는 스무 살 초반에 아버지의 후광을 뒤에 업고 북일로코스 지역의 부지사로 정치에 입문했었지만 1986년 아버지가 물러나면서 정계를 떠나야 했다. 하지만 1992년 북일로코스 지역 하원의원으로 다시 정치에 복귀했다. 봉봉 마르코스는 대선 기간 아버지의 행적에 대해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룬 시기"였음을 강조한 바 있다. 코라손 아키노(코리 아키노) 전 대통령은 1987년에는 공화국법(REPUBLIC ACT NO. 6639)을 하나 발표했는데, 이 공화국법이 바로 마닐라 국제공항(Manila International Airport)의 명칭을 니노이 아키노 국제 공항(NAIA. Ninoy Aquino International Airport)으로 바꾸는 내용을 담고 있는 법이다.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Presidential Communications Office · Proclamation No. 665, s. 2024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뉴스: 2017년 필리핀에서 제일 많이 사용하는 포털사이트

    필리핀 뉴스와 정보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뉴스와 정보 필리핀 뉴스: 2017년 필리핀에서 제일 많이 사용하는 포털사이트 ⚝ 저작권 안내 :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17년 4월 18일 벌써 오래전처럼 느껴지는 지난 2004년의 일이다. 주커버그가 미국 CNBC에 출연하여 옛 된 얼굴로 "우리가 어디까지 갈지 누가 알겠냐"는 이야기를 했다. 고작 몇백 명 정도가 가입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페이스북을 만들었지만, 그래도 장차 얼마나 성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는 옳았다. 페이스북(Facebook)은 2017년 현재 전 세계 12억 명의 서비스 이용자를 확보하고 있으니 말이다. 2017년 지금은 그 누구도 페이스북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할 필요가 없어졌다. 국가별로 주로 사용하는 사이트를 알면 해당 국가를 대상으로 무언가 교류를 할 때 꽤 유용하다. 사업을 하고 있어 마케팅을 해야 한다면 더욱 그렇다. 국가별로 주로 사용하는 사이트가 다르기 때문인데, 각 문화에 따라 선호하는 형태가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일단 한국인이 제일 많이 사용하는 사이트는 네이버이다. 통계 결과에 대한 신뢰도가 얼마나 될까 모르겠지만, 아무튼 관련된 통계 순위를 검색해 보면 어느 평가 사이트이든 동일하게 예상하던 대로의 결과가 나오는 셈이다. 네이버가 독보적으로 1위이고, 다음이 구글(google). 유튜브(youtube), 다음(Daum) 등이다. 한국의 경우 네이버의 점유율이 월등히 높은 것이 특징이다. 대한민국 전체인구 51,446,201명 중 대부분이 무언가를 검색할 때 네이버를 쓰고 있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왜 아직도 네이버인가, 혹은 네이버 말고 다른 것은 어떠한가는 질문은 끊임없이 나오지만, 그래도 여전히 누구나 네이버가 가진 힘은 인정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필리핀에서 최고의 인기 웹사이트는 어디일까? 웹사이트 분석 평가해주는 서비스를 하는 알렉사(Alexa)와 시밀러웹(SimilarWeb)을 보면 전 세계의 글로벌 순위 및 국가별 순위를 볼 수 있다. 시밀러웹(SimilarWeb)에 의하면 필리핀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사이트는 구글, 페이스북, 그리고 유튜브 다. 구글이야 검색엔진이라고 하면 소통하는 장소로 가장 인기가 좋은 곳은 페이스북이 되는 셈이다. 실제 대다수의 필리핀 사람들이 페이스북 계정을 가지고 있고, 페이스북을 통해 주변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사업을 한다. 그리고 필리핀 내에서 운영되는 개별 사이트의 순위만을 보여주는 필리핀 사이트랭크 에 의하면 현재 필리핀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사이트는 ABS-CBN TV 네트워크 사이트라고 한다. 그다음을 잇는 것은 인콰이어러(Inquirer)와 GMA 네트워크(GMA Network)이다. 쇼핑몰인 라자다와 olx 사이트의 순위도 꽤 높은 편이다. 순위권 내 주요 사이트를 제외하고 나머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극히 미미하다. 필리핀 웹사이트 순위 출처: 사이트랭크(Updated: Apr. 18, 2017) # Domain Name Title Rank 1 abs-cbn.com ABS-CBN 222 2 inquirer.net Philippine Daily Inquirer 629 3 gmanetwork.com iGMA tv 775 4 lazada.com.ph LAZADA 941 5 rappler.com Rappler 1,546 6 olx.ph OLX ph 4,329 7 metrodeal.com MetroDeal Philippines 5,339 8 deped.gov.ph Department of Education (DepEd) 7,140 9 cebupacificair.com Cebu Pacific Air 7,356 10 mb.com.ph The Manila Bulletin Online 9,267 11 philstar.com philstar 9,919 12 jobstreet.com.ph JobStreet 11,140 13 wheninmanila.com WhenInManila 11,703 14 bpiexpressonline.com Bank of the Philippine Islands 12,626 15 globe.com.ph Globe 14,441 16 bdo.com.ph BDO Unibank, Inc. | Banco De Oro | BDO Philippines 14,986 17 sunstar.com.ph Sun Star Network Online 15,457 18 philippineairlines.com Philippine Airlines 20,265 19 zalora.com.ph ZALORA - Philippines 22,863 20 pep.ph Philippine Entertainment Portal 22,896 참고로 웹사이트 분석 및 평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사이트들은 아래와 같다. 국내 기업인 랭키닷컴도 비슷한 서비스를 하지만 유료 결제해야 볼 수 있는 자료가 대부분이다. - 시밀러웹(SimilarWeb) : https://www.similarweb.com/ - 알렉사(Alexa) : www.alexa.com - 블로그차트 : http://www.blogchart.co.kr/ - 랭키닷컴 : https://www.rankey.com/ 전세계 웹사이트 랭킹 (출처 : 시밀러웹 SimilarWeb ) 필리핀 웹사이트 랭킹 (출처 : 시밀러웹 SimilarWeb )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필리핀 사이트랭크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필리핀 법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이 취득한 예술품에 대해 몰수 판결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필리핀 법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이 취득한 예술품에 대해 몰수 판결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19년 12월 21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마르코스 가족이 떠난 뒤 말라카냥궁(대통령궁)에서 발견된 3천 켤레의 신발은 마르코스 가족의 사치를 상징하게 됐다. 마르코스 정권에 투쟁하다가 귀국길에 암살당한 베니그노 아키노 2세(니노이 아키노) 는 비록 필리핀의 대통령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지만, 부인( 코라손 아키노 )과 아들(노이노이 아키노)은 모두 필리핀의 대통령이 되었다. 마닐라공항의 공식 명칭이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NAIA. Ninoy Aquino International Airport) 이고, 마닐라공항의 이름이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으로 바뀐 까닭이 니노이 아키노가 1983년에 공항 터미널1의 11번 게이트 주변에서 암살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많겠지만, 필리핀의 전 대통령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나 그의 부인 이멜다의 이름만큼은 한국인에게도 퍽 친숙하다. 독재자로 유명했던 남의 나라 대통령에게 호감이 있어서는 아니고, 일반인들은 상상조차 어려운 금액의 재산을 불법 축재했기 때문이다. 영부인이었던 이멜다 마르코스는 각종 예술품과 사치품을 수집하였던 것으로도 유명한데, 미술품 중에는 피카소와 빈센트 반 고흐, 클로드 모네, 앙리 마티스 등의 작품까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최근 필리핀 산디간바얀(Sandiganbayan) 반부패 특별법원에서는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 일가가 집권 기간 사들인 고가의 미술품을 정부에 귀속하라고 판결했다. 대통령 재임 동안 받을 수 있었던 급여가 총 30만 4372달러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2432만 달러에 달하는 미술품을 살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합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법원에서 마르코스 일가가 미술품들을 합법적으로 취득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니 반가운 이야기이다. 산디간바얀 법원의 2019년 12월 19일 판결에 따라 마르코스 일가가 보유하고 있는 896점의 미술품들의 처분, 매매, 양도가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처분한 미술품으로 발생한 수익금까지 내놓아야 한다. 이 미술품을 정부에 귀속시킨다고 마르코스가 빼돌린 100억 달러의 재산 전부가 돌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흐가 그린 명화가 탐욕스러운 개인의 주머니에 가는 것을 조금은 막게 된 셈이다. 한편, 마르코스 가문의 불법 재산은 보석이나 예술 작품만이 아니다. 해외 은행 계좌에 보관된 재산과 각종 부동산 자산, 보석류 등의 금액을 현재 화폐 가치로 따지면 최소 100억 달러(한화로 약 11조에 해당)로 추정된다. 마르코스가 21년 동안 필리핀을 장기 집권하면서 불법 취득한 재산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파악할 방법이 없지만, 최대 300억 달러에 이를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Inquirer: Sandiganbayan declares over 800 Marcoses-owned artworks as ill-gotten · Philstar: Marcoses ordered to forfeit ill-gotten paintings, art worth millions of dollars · rappler: Marcos family’s entire art collection ‘unlawfully acquired’ – Sandiganbayan · GMA News: The Supreme Court’s rulings on the Marcoses’ ill-gotten wealth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마닐라 타귁시티(Taguig City) 지명의 유래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마닐라 타귁시티(Taguig City) 지명의 유래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3월 1일 필리핀 마닐라. 타귁시청 Taguig City Hall 사전에서 격세지감이란 단어의 뜻을 찾아보면 '오래지 않은 동안에 몰라보게 변하여 아주 다른 세상이 된 것 같은 느낌'이라는 설명을 볼 수 있다. 이 설명의 뜻을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1970년대 타귁시티(Taguig City) 주변을 촬영한 사진을 보면 된다. 변변한 건물은커녕 도로조차 없어서 아무리 봐도 타귁시티로는 보이지 않는다. 요즘 보니파시오의 모습을 보면 상상도 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20년 전만 해도 높은 건물이라고는 하나 보기 어려운 동네였다고 한다. 실제 타귁시티가 고도로 도시화된 도시(HUC, Highly Urbanized City)로 분류 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4년 12월 8일부터이다. 그러니까 그전까지만 해도 행정구역상 시티가 아닌 무니시팔리티(Municipality of Taguig)였다. 그런데 타귁시티의 이름은 어떤 의미을 가지고 있을까? 타귁은 타갈로그어 mga taga-giik(threshers)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탈곡기를 뜻하는 타가기익(taga-giik)이 발음의 편의상 'Tagui-ig'가 되었다가 현재의 타귁(Taguig)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지금이야 화려한 도시 풍경이지만, 예전에는 대부분 농경지였을 터이니 지명의 유래는 쉽게 이해되지만, 타가기익이 어떤 모양의 탈곡기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타가기익(taga-giik)이란 것이 어떤 모양인지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아무리 검색을 해봐도 변변한 사진 자료 하 보이지 않았다. 겨우 워싱턴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다는 흑백사진을 한 장 찾았지만, 대체 어떻게 해서 벼 이삭에서 낟알을 떨어내는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좌우 양쪽으로 지지대를 만들고 양쪽에 긴 대나무를 걸쳐 손잡이를 만든 뒤, 이 손잡이를 잡고 발로 밟아 타작한 듯한데 정확하지는 않다. 농업과 관련된 사이트까지 죄다 뒤져봐도 정확한 설명이 없는 것이 타귁시티 인근에서만 이 탈곡기를 사용했을 뿐, 필리핀 전 지역에서 사용하던 것은 아니었다고 추측된다. 아쉬운 일이지만, 아무리 신기한 사진을 찍어도 유튜브나 틱톡에 올리지 못했을 100년 전에는 귀한 카메라를 들고 타귁시티까지 가서 농부들이 수확하는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둘 만큼 한가했던 이가 없었던 모양이다. taga-giik ⓒUniversity of Washington 타귁시티의 BCG는 보니파시오 글로벌 시티(Bonifcio Global City)를 의미한다. Bonifcio Global City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City Government of Taguig: ORIGIN OF THE NAME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일본 점령기(1942년~1945년)에 세워진 필리핀 제2공화국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일본 점령기(1942년~1945년)에 세워진 필리핀 제2공화국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8월 2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일본 점령기 1942년~1945년 기록에 따르면 클락의 하늘에서 일본 정찰기가 처음으로 발견된 것은 1941년 12월 2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닷새 뒤,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 전쟁(대동아 전쟁)을 시작 했다. 진주만 공습한 일본은 바로 태평양 지역의 미국 식민지이자 주요 거점이기도 한 필리핀에 대한 침공을 시작했다. 당시 일본은 태평양 지역의 미국 식민지이자 주요 거점이기도 한 필리핀을 침공하여 미국군이 필리핀을 작전의 전진 기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물자를 아끼지 않고 공세를 퍼부었다. 고무며 석유 등과 같은 물자는 전쟁을 위해 꼭 필요했고, 이런 물자를 일본으로 운송하기 위해는 재빨리 필리핀을 점령하여 해상 교통로를 확보해야만 했다. 1941년 12월 8일 클락공군기지에 대한 폭격을 시작으로 일본은 필리핀 침략에 나섰다. 이후 12월 22일 필리핀에 상륙한 일본군 주력군은 1942년 1월 2일 마닐라를 점령하는 것에 성공한다. 미국 육군극동사령부(USAFFE)는 마닐라를 무방비 도시(open city)로 선언하고 바탄 지역으로 후퇴하여 전쟁을 계속했지만,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 본토로부터 지원이 끊긴 상황 이라 바탄 전투(Battle of Bataan) 에서의 승리를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맥아더 사령관이 연합군 서남태평양 사령관으로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난 이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으나 결국 바탄에 이어 코레히도르섬까지 함락되었다. 1942년 5월, 맥아더의 뒤를 이어 사령관 자리에 올랐던 웨인 라이트 사령관은 일본에 항복하게 된다. 한편, 필리핀 자치령 코먼웰스(Commonwealth)의 대통령이었던 마누엘 케손 대통령은 일본의 필리핀 점령이 확실해지자 코레히로드섬(Corregidor island)으로 피신했다가 민다나오와 호주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1942년, 필리핀에 주둔했던 미군이 일본에 밀려 철수하자 일본은 일본 군정의 성립과 계엄령을 선포한다. 그리고 필리핀이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얻기 위한 준비기간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 필리핀을 점령한 일본의 군사 지배는 형식적이나마 미국으로부터 필리핀을 독립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일본에 협력하는 단체를 구성하고, 친일파를 모아 새로 의회를 만들고, 필리핀 독립준비위원회(PCPI)라는 이름으로 단체를 조직하는 이 모든 일이 불과 몇 달 동안 벌어졌다. 그리고 1943년 10월 14일, 일본은 호세 라우렐을 대통령으로 내세워 필리핀 제2공화국을 수립한다. 일본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허수아비 정부였다. 일본에서 친일 괴뢰정부를 통해 필리핀에 허울뿐인 '독립'을 부여하였던 동안 일본 점령기 내내 필리핀인들은 고문과 약탈, 강간 등과 같은 잔혹 행위를 겪어야 했다. 필리핀 전역에서 일본에 저항하는 게릴라전이 벌어졌지만, 미디어를 통제하고 학교에서 '일본의 가치와 정신'을 가르치는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에 협력하는 사람 또한 늘어났다. 전쟁으로 인해 주요 사회 기반 시설이 대부분 파괴되었고, 사회 혼란은 계속되었다. 마을 전체에 대한 학살이 전국에서 일어나 민간인이 한꺼번에 떼죽음을 당하는 일도 빈번했다. 일본의 점령은 태평양 지역 연합군 사령관이자 미 극동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이 레이테섬을 상륙하고 마닐라를 재탈환하는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대동아 전쟁)은 1945년 8월 미국이 원자 폭탄을 투하함으로써 끝이 났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은 USS 미주리 전함에서 맥아더 장군의 감독 하에 항복문서에 공식적으로 서명했다. 𖠿 관련 글 보기: 필리핀 역사: 1942년, 바탄 반도를 피로 물들인 바탄 전투(Battle of Bataan) 필리핀 역사: 잔인한 4월,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 일본 점령기에 발행되었던 1센타보 지폐, 밤반 제2차 세계대전 박물관(Bamban WWII Museum) 소장품 일본의 점령을 묘사한 디오라마 - 야얄라 뮤지엄(Ayala Museum) 소장품 마닐라 타귁시티의 Philippine Army Grandstand에 있는 Hunters ROTC 동상. Hunters ROTC는 일본 점령기 동안 항일운동을 한 게릴라 부대이다.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The National WWII Museum: Liberation of the Philippines 1945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유적지: 필리핀 독립 기념 국기게양대 - 1946년 독립기념일 행사의 장소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유적지: 필리핀 독립 기념 국기게양대 - 1946년 독립기념일 행사의 장소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9월 26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필리핀 마닐라 리잘파크, 필리핀 독립 기념 국기게양대(Independence Flagpole) 필리핀 마닐라에 와서 여행 중에 리잘파크(리잘공원)의 호세 리잘 기념비를 보러 갔다가 필리핀 국기를 보았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필리핀의 미국 식민지 시대 역사유적지에 다녀온 셈이 된다. 바로 그 국기가 있는 자리가 필리핀이 1946년 7월 4일 미국으로부터 독립했을 때 필리핀 국기를 게양한 위치이기 때문이다. 필리핀 독립 기념 국기게양대 Independence Flagpole ■ 위치: 필리핀 마닐라 리잘파크, 호세 리잘 기념비 근처 ■ 주소: Ermita, Manila, 1000 Metro Manila, Philippines 마닐라의 리잘파크까지 가도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알고 보면 리잘파크의 호세 리잘 기념비 앞에 있는 국기는 꽤 의미 있는 국기이다. 일단 이 국기게양대는 필리핀에서 가장 높은 깃대를 자랑한다. 하지만 필리핀 정부에서 리잘파크의 국기게양대를 매우 소중하게 관리하는 것은 그 높이보다 역사적 의미 때문이다. 1898년부터 1946년까지 이어졌던 미국 식민지 시대를 끝내는 날, 필리핀 정부에서는 미국의 성조기를 내리고 대신 필리핀 국기를 올리는 국기 게양 행사를 진행했다. 그런데 그때 바로 그 국기게양식을 진행한 자리가 바로 리잘파크의 필리핀 국기가 있는 자리이다. 𖠿 관련 글 보기: 필리핀 역사: 1946년 7월 4일, 미국으로부터 독립한 날 리잘파크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물론 세월의 흐름에 따라 국기는 물론 국기게양대 자체도 바뀌었다. 리잘파크의 국기게양대는 원래 45.72m 높이로 만들어졌었지만, 1995년 태풍으로 국기게양대의 높이가 조금 줄어들었다. 손상된 깃대를 수리하면서 32m로 높이를 줄인 것이다. 이후 바닥 조명 설치 등과 같은 몇 번의 개보수를 거쳐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참고로 대한민국에 국기의 게양·관리 및 선양에 관한 규정이 있는 것처럼 필리핀에도 필리핀 국기에 관한 법이 있는데 이 공화국법(Republic Act 8491) 에 따라 필리핀 독립 기념 국기게양대는 일 년 내내 24시간 국기가 게양된다. 매월 첫 번째 월요일 아침에는 국기 게양식 행사도 진행된다. 필리핀 독립 기념 국기게양대는 인트라무로스에 있는 발루아르테 데 산디에고(Baluarte de San Diego) 석조 요새에서도 보일 정도로 높다. 필리핀 마닐라 리잘파크, 필리핀 독립 기념 국기게양대(Independence Flagpole)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Official Gazette: Statement: DOT on the Rizal Park Independence Flagpole Project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공휴일의 의미와 유래: 바탄 죽음의 행진과 용사의 날(바탄 전투 기념일) - 4월 9일

    필리핀 공휴일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공휴일 필리핀 공휴일의 의미와 유래: 바탄 죽음의 행진과 용사의 날(바탄 전투 기념일) - 4월 9일 ⚝ 저작권 안내 :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9월 23일 매년 4월 9일은 아라우 낭 카기팅안(Araw ng Kagitingan)이라고 부르는 필리핀 공휴일이다. 그런데 필리핀어 카기팅안(Kagitingan)을 한국어로 번역하기란 쉽지 않다. 영어로는 Day of Valor라고 적지만, 한국어로는 용사의 날, 용맹의 날, 용기의 날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바탄전투의 희생자를 기리는 날이라서 바탄 전투기념일(바타안 전투기념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주필리핀 대한민국 대사관에서는 휴무일 안내를 할 때 용사의 날(Araw ng Kagitinga)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용사의 날 Araw ng Kagitingan Day of Valor 공휴일 날짜: 매년 4월 9일 1942년 4월 9일, 미군이 일본에 항복하며 바탄 전투(Battle of Bataan) 가 끝났다. 바탄전투에서 약 76,000명의 군인이 살아남았지만, 이들은 모두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야만 했다. 일본군의 포로가 된 미국-필리핀 연합군은 바탄 마리벨레스에서 딸락 카파스에 있는 캠프 오도넬까지 100km 넘는 거리를 행군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최소 1만 명이 굶주림과 탈진, 말라리아 감염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이 비극적인 행군은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 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필리핀 정부에서는 바탄 전투가 끝난 날이자 바탄 죽음의 행진이 시작된 1942년 4월 9일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9일을 용사의 날(Araw ng Kagitinga) 공휴일로 정하고 각종 기념행사 및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용사의 날 주요 행사는 사맛산 바탄 전투 전쟁기념관(Mount Samat National Shrine) 에서 진행된다. 대한민국에서 현충일이 되면 대통령이 국립서울현충원을 방문하여 참배하듯이 필리핀에서도 용사의 날이 되면 필리핀 대통령과 정부 주요 인사가 사맛산에 가서 바탄전투의 희생자의 헌신에 경의를 표하고 추모의 뜻을 나타낸다. 가톨릭 국가답게 가톨릭 미사가 진행된다는 것만 제외하면 추념식은 한국의 현충일과 거의 비슷하게 진행된다. 2024년 행사는 용사의 날 82주년을 기념하여 참전 용사인 펠리시시마 델라 크루즈가 참석하여 종을 울리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한편, 필리핀에서 이렇게 바탄 전쟁의 희생자들을 국가 공휴일로 기리게 된 것은 지난 1961년부터이다. 당시 필리핀의 대통령이었던 카를로스 가르시아 대통령은 공화국법 제3022호(Republic Act No. 3022)를 통해 매년 4월 9일을 바탄의 날(Bataan Day)로 선포했다. 그 후 바탄의 날은 여러 번에 걸쳐 그 이름이 바뀌었는데, 1987년에는 Araw ng Kagitingan(Bataan and Corregidor Day)라고 칭하기도 했다. 필리핀 사람들이 아직도 4월 9일을 바탄 데이(Bataan Day) 또는 코레히도르 데이(Corregidor Day)라고 칭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이때의 기억 때문이다. 그러다가 베니그노 아키노 3세(노이노이 아키노)가 대통령이 되면서 공휴일 이름을 아라우 낭 카기팅안(Araw ng Kagitinga)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2011년 아키노 대통령이 서명한 휴일 관련 선언문(PROCLAMATION NO. 84)을 보면 2011년 4월 9일에 대해 아라우 낭 카기팅안(Araw ng Kagitinga)으로 선포한 것을 알 수 있다. 필리핀에서 용사의 날은 정규휴일(Regular holiday) 로 분류된다. 𖠿 관련 글 보기 필리핀 역사: 1942년, 바탄 반도를 피로 물들인 바탄 전투(Battle of Bataan) 필리핀 역사: 잔인한 4월,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 필리핀 역사 유적지: 바탄 죽음의 행진과 사맛산 십자가 바탄 죽음의 행진 표지석 사맛산 바탄 전투 전쟁기념관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Proclamation No. 84 · 주필리핀 대한민국 대사관: 대사관 휴무일 안내 (4.9-4.10) · RTVMalacanang: 82nd Anniversary of the Araw ng Kagitingan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유적지: 비간의 일로코스 박물관 단지 - 바씨 갤러리(Basi Gallery)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유적지: 비간의 일로코스 박물관 단지 - 바씨 갤러리(Basi Gallery)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10월 14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1807년에 일로코스 지에서 일어났었던 바씨 반란(Basi Revolt) 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필리핀 비간 시티(City of Vigan)에 있는 일로코스 박물관 단지(Ilocos Regional Museum Complex) 에 가면 된다. 바씨 반란과 관련된 14점의 유화를 통해 바씨 반란 때 어린 일이 발생했는지를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그림은 비간 출신의 화가인 에스테반 빌라누에바(Esteban Pichay Villanueva)의 작품으로 1821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바씨 반란의 과정을 시리즈로 만들어 표현한 유일한 작품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14점의 그림 시리즈 모두 2009년에 국가 문화재(National Cultural Treasures)로 지정되었다. 필리핀국립박물관에서는 일로코스 지역 전통술인 바씨(Basi)에 대한 전시실도 함께 운영하고 있어 바씨를 만들 때 쓰던 전통 도구와 함께 파타얀(Tapayan) 토기를 볼 수 있다. 일로코스 지방 박물관 단지 Ilocos Regional Museum Complex ■ 주소: Ilocos Regional Museum Complex, Burgos Street, Vigan City, Ilocos Sur ■ 위치: 필리핀 비간 / 일로코스주 의사당(provincial capitol building) 근처 ■ 운영시간: 오전 9시~오후 5시 / 월요일 휴관 ■ 입장료: 무료 일로코스 박물관 단지(Ilocos Regional Museum Complex) 바씨 갤러리(Basi Gallery) 바씨 갤러리(Basi Gallery) 바씨를 만들 때 쓰던 전통 도구 파타얀(Tapayan) 토기 파타얀(Tapayan) 토기 파타얀(Tapayan) 토기 스페인 식민지 시대 일로코스에서 일어났던 바씨 반란(Basi Revolt)에 대한 전시실 바씨 반란과 관련된 14점의 그림 시리즈 바씨 반란과 관련된 그림을 통해 바씨 반란의 모습을 좀 더 생생하게 볼 수 있다.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National Museum of the Philippines: The Basi Revolt · National Museum of the Philippines: Basi Gallery · National Museum of the Philippines: National Museum of the Philippines – Ilocos · Manila Bulletin: National Museum launches virtual edition of 'The Basi Revolt'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항공산업의 역사: 1948년, 닐슨공항 이전과 마카티 시티의 개발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항공산업의 역사: 1948년, 닐슨공항 이전과 마카티 시티의 개발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9월 1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Makati, Ayala Triangle Gardens 1945년의 1월, 전쟁은 도무지 그 끝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루손섬에서는 전투가 계속되었고, 민다나오섬을 비롯한 다른 섬에서의 저항도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힘겨웠던 시절도 끝이라는 것이 있었다. 1945년 9월 2일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 약 3천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 희생자 수를 기록해야만 했던 가혹한 전쟁이었다. 하지만 삶은 전쟁 이전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마닐라는 폐허가 되어 있었으니, 모두가 힘을 모아 도시 재건을 외쳐야만 했다. 공항 이전과 마카티 시티의 개발 아얄라 가문은 말라떼와 에르미타 등 마닐라 도심 지역이 완전히 파괴된 것을 보고 새롭게 마닐라 도심에 주택가와 금융센터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아얄라 가문에서 마카티를 상업지구로 만들 계획을 세우던 중에 닐스 필드 에어포트(Nielson Field airport)가 미군 비행장이었던 니콜스 필드(Nichols Field)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그리고 닐슨 공항이 니콜스 필드로 이전함에 따라 아얄라 트라이앵글 주변의 토지가 다시 아얄라로 반환 되었다. 아얄라에서는 제어탑(Nielson Tower)과 여객터미널 시설만 제외하고 공항 시설의 대부분을 마카티 시티의 개발에 활용 하기로 하는데, 공항 활주로 중 기본 활주로는 현재의 아얄라 애비뉴(Ayala Avenue) 도로로, 보조 활주로는 현재의 파세오 데 로하스(Paseo de Roxas) 도로로 전환되는 식이었다. 비즈니스 및 상업 지구로서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게 된 것이다. 무척이나 많은 변화가 한꺼번에 일어났던 시기였다. 필리핀의 제5대 대통령이었던 마누엘 로하스(Manuel Acuna Roxas) 대통령은 1946년부터 1948년까지 그의 재임 기간 중 전후 복구 사업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공항에 대한 복구도 잊지 않았다. 로하스 대통령은 닐슨 공항을 대신할 새로운 공항 건설을 명령하였고, 1948년에 마닐라공항은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된다. 마카티를 떠나 지금 마닐라공항의 자리로 공항을 옮기게 된 것이다. 파라냐케와 파사이 시티 사이 경계선 쪽이 신공항 후보지로 거론된 것은 공항 활주로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부지를 마련할 수 있으며, 지형이 평평하여 비행기가 이·착륙하기에 적당하다는 이유였다. 당시만 해도 70여 년이 흐른 뒤 마닐라공항이 '최악의 공항'이라고 불릴 정도로 혼잡해지리라는 것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𖠿 관련 글 보기: 필리핀 항공산업의 역사: 1935년, 필리핀 최초의 상업용 공항 개항 필리핀 항공산업의 역사: 1937년, 마카티 닐슨공항이 문을 열다 필리핀 항공산업의 역사: 1941년, 필리핀항공은 왜 바기오 노선부터 상업 비행을 시작했을까? 마닐라 마카티. 아얄라 트라이앵글 공원 지역. 예전에 공항이 있었다는 흔적은 관제탑 건물(블랙 버드 레스토랑)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 1949년도에 그려진 마닐라공항 스케치 (출처 : http://www.lougopal.com/manila/ ) 아얄라 트라이앵글 가든 - Makati, Ayala Triangle Gardens Makati, Ayala Tower One Makati, Ayala Tower One Makati, Insular Life - Ayala Avenue Makati, Teleperformance Center Ayala Makati, Teleperformance Center Ayala 필리핀 마닐라 마카티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Filipinas Heritage Library https://www.filipinaslibrary.org.ph/ · Blackbird Restaurant 공식 홈페이지 http://www.blackbird.com.ph · Philippine History and Architecture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Philippine-History-and-Architecture-111131982293260/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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