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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역사: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와 카를로스 1세(카를 5세)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와 카를로스 1세(카를 5세)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2월 28일 마닐라 마카티의 아얄라 박물관(Ayala Museum)에 전시된 범선의 모형 업무 스트레스가 상당히 심하다는 자리가 왕의 자리이다. 그런 왕의 자리에서 일만 아는 일벌레로 살면 장수하기 힘들 것 같지만, 오스트리아의 왕실을 거의 600년 동안 지배하였다는 합스부르크가 왕가 출신의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는 고희의 나이까지 살았다. 당시 평균 수명으로 보았을 때는 상당히 장수한 셈이다. 펠리페 2세(Felipe II) 펠리페 2세 Felipe II 1527년 3월 21일 출생~ 1598년 9월 13일 사망 스페인 최전성기의 스페인 국왕 필리핀의 국명은 펠리페 2세에서 유래함 펠리페 2세는 조선에서 연산군의 뒤를 이어 중종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시기(1527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선조 31년(1598년)에 죽었는데 왕위를 물려주기 전까지 거의 궁정에 틀어박힌 채 서류 정리에 집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의 최강국 에스파냐(영어식 국명은 스페인)가 해가 지는 국가가 되어 버린 원인 중 하나로 펠리페 2세가 종교 전쟁을 위한 서류에 마구 서명했다는 것을 꼽을 정도이다. 펠리페 2세는 1556년에 아버지 카를 5세(카를로스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1598년 죽기 전까지 에스파냐 왕으로 재위했는데, 그가 통치했을 당시 에스파냐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릴 만큼 황금시대를 보낼 수 있었다. 독실한 가톨릭교도였던 펠리페 2세는 로마 가톨릭을 통한 국가 통합을 추구하였는데, 하루 14시간 이상을 집무실에서 보낼 정도로 성실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성실한 왕에게서 5척의 배를 지원받아 원정을 떠난 이가 바로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 이다. 1565년 필리핀에 도착한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Miguel Lopez de Legazpi, 1502년~1572년)는 세부 지역을 기반으로 필리핀 정복에 나섰다. 하지만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는 1571년이 되어서야 펠리페 2세에게 필리핀을 정복했다고 보고할 수 있었다. 하지만 7개의 바다를 지배하며 에스파냐의 황금시대를 이끈 절대군주라고 해도 암을 이길 수는 없었다. 펠리페 2세는 동남아시아에 있는 7천 개의 섬나라를 식민지로 삼아서 필리핀(Philippines) 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한 뒤 엘 에스코리알 궁전에서 사망했다. 카를 5세(Karl V) 카를 5세 Karl V(Charles V) 스페인에서의 명칭은 카를로스 1세( Carlos I) 1500년 2월 24일 출생~1558년 9월 21일 사망 ‘해가 지지 않는 해양제국’ 스페인의 통치자 에스파냐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카를로스 1세)는 1500년에 태어나 1558년 사망했다. 중세 유럽에서 가장 많은 국가의 왕관을 쓴 인물로 평가되는 카를 5세는 무려 17개나 되는 왕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근친결혼이 불러오는 유전적 결함을 이야기할 때 꼭 거론되는 이 왕은 합스부르크 왕가 가문 특유의 유전병인 주걱턱 현상으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하는데, 말년에는 심한 통풍으로도 고생했다고 한다. 카를 5세는 성인이 되기도 전인 1516년에 에스파냐 국왕의 자리에 올랐는데, 1556년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카를 5세가 가졌던 신성로마제국의 왕위는 동생인 페르디난드 1세에게 주어졌지만, 에스파냐의 왕위는 아들이었던 펠리페 2세(Felipe II)가 물려받았다. 필리핀 국기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National Quincentennial Committee: Philippines First Circumnavigation Map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5페소 지폐와 캠프 아기날도까지,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흔적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5페소 지폐와 캠프 아기날도까지,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흔적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9월 23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필리핀 생활을 하다 보면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좋든 싫든 그의 흔적을 수시로 볼 수 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필리핀 국기를 도안했으니 말이다. 필리핀 국가인 루팡 히니랑(Lupang Hinirang) 역시 그가 1898년 6월 12일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했을 때 훌리안 펠리페(Julian Felipe)에게 의뢰하여 만들었던 필리핀 국가 행진곡(Marcha Nacional Filipina)에서 유래한다. 화폐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그의 카비테 자택(스페인으로부터 독립선언을 했던 장소)은 1985년에 발행되었던 구권 5페소 지폐 도안으로 채택되었었다. 이 5페소 지폐는 현재 사용되지 않는다. 지명 - 필리핀군(AFP)의 총사령부가 있는 곳은 퀘존의 캠프 아기날도(Camp Aguinaldo)이다. 이곳은 원래 캠프 머피(Camp Murphy)라고 불렀지만, 1965년 서명된 공화국법 제4434호(REPUBLIC ACT No. 4434)에 따라 CGEA(Camp General Emilio Aguinaldo)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 카비테의 카윗에 가면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이름을 가진 '제너럴 에밀리오 아기날도'라는 이름의 동네가 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생가는 이 지역과 꽤 떨어져 있지만, 바일렌(Bailen)에서는 1965년 6월 19일 제너럴 에밀리오 아기날도(Municipality of General Emilio Aguinaldo)로 행정구역의 이름을 바꾸었다. 유적지 - 카비떼의 카윗(Kawit)에 가면 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Aguinaldo Shrine and Museum)을 관람할 수 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생가를 박물관으로 개조한 곳으로 이곳에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무덤도 있다. - 1898년도에 필리핀 제헌의회가 열렸던 불라칸 말로로스에 있는 바라소아인 성당(Barasoain Church)에 가면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관련된 자료가 가득한 1899년 공화국 박물관(Museo ng Republika ng 1899)을 관람할 수 있다. 𖠿 관련 글 보기 필리핀 역사: 친일파가 되었던 독립운동가, 필리핀의 제1대 대통령 에밀리오 아기날도 필리핀 역사 유적지: 불라칸 말로로스의 바라소아인 성당과 필리핀 제1공화국 박물관 필리핀 역사 유적지: 스페인로부터의 독립 선언을 했던 장소, 카비테의 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 카비테 카윗의 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Aguinaldo Shrine and Museum) 필리핀 말라카냥궁(Malacanang Palace)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REPUBLIC ACT No. 4434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따가이따이 맛집: 따알호수 근처, 탐앤탐스 커피 블랙
필리핀 맛집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맛집 필리핀 따가이따이 맛집: 따알호수 근처, 탐앤탐스 커피 블랙 ⚝ 저작권 안내 :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7월 28일 주차장에서 멀리 따알호수의 풍경을 볼 수 있다. 따가이따이에는 따알호수 주변으로 멋진 카페가 가득하지만, 장사가 잘되는 집이 얼마나 많을지는 알 수 없다. 스타벅스가 가장 손님이 많은 것은 거의 확실하지만, 2위는 글쎄, 어디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일요일이라 따가이따이(Tagaytay)에 드라이브를 나갔다가 탐앤탐스 커피 블랙(Tom N Toms Coffee Black) 에 방문했다. 따가이따이의 커피숍하면 스타벅스가 독보적인 인기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미 여러 번 가본 터라 매우 짐작이 가능한 풍경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올티가스 탐앤탐스의 단골답게 새로 문을 연 탐앤탐스에 가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지난 2024년 7월 13일에 문을 열었다는 따가이따이 탐앤탐스는 내게 딱 한 가지만 만족시켜 주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내 일요일 아침을 짐작 가능한 시간으로 채우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시 이곳 매장에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저희 아직 오픈 전인데요..." 가장 손님이 많을 일요일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매장은 아직 문을 열지 않고 있었다. 매장 바깥에 영업시간에 대한 안내문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만, 직원이 9시는 되어야 커피숍의 문을 연다고 했다. 그냥 돌아서려는데 직원이 아메리카노처럼 간단한 음료와 빵은 주문할 수 있다고 알려 왔다. 이곳 탐앤탐스는 호텔 조식 메뉴 비슷하게 식사에 가까운 메뉴도 많이 팔지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서 식빵으로 만드는 시나몬 브레드와 허니넛 브레드 두 가지만 주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메뉴판을 볼 수고를 할 필요도 없이 아메리카노 두 잔과 시나몬 브레드를 주문했다. 문제는 계산대에서 시작되었다. 가끔 친절하지만 큰 도움을 주지는 못하는 직원을 보게 되는데, 이곳 탐앤탐스 직원이 그런 타입의 사람이었다. 665페소가 나왔기에 천 페소를 내밀었더니 잔돈이 전혀 없다고 했다. 카드나 지캐시는 사용이 안 되고 현금만 받는 것이야 매장 정책이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거스름돈을 줄 잔돈 335페소가 없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근 문을 열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뭔가 매장 내 특별한 상황이 있는 것인지 그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잔돈이 없으니 정확한 금액을 가지고 와야 주문을 도와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왔다. 하지만 내 지갑에 665페소가 딱 맞추어 들어 있을 리가 만무하다. 결국 지갑을 뒤져 500페소를 찾아낸 뒤 커피 한 잔과 브레드 하나로 정확히 500페소를 만든 뒤에야 가까스로 주문을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매장 오픈 시간 전임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손님이 오가는 상황에서 직원이 흡사 속옷처럼 보이는 흰색 민소매 옷을 입고 커피머신을 만지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심각하게 느린 서빙 속도였다.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에 시나몬 브레드 하나 주는 것에 20분 이상 걸릴 일인지 모르지만, 한참이나 기다려도 커피는 나오지 않았다. 그럭저럭 간신히 커피를 받아 들고 165페소나 주기는 아까운 맛이란 생각을 하면서 마시는데 다른 손님이 속속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직 9시가 되려면 한참 남았는데, 이렇게 주문을 계속 받을 것이라면 매장 오픈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매장 문을 연 지 고작 보름밖에 되지 않아서 뭔가 정리가 덜 된 모양이었다. 어쨌든 한 가지만은 확실했으니, 나 외에는 모두 잔돈을 넉넉히 들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Tom N Toms Coffee Black Tom N Toms Coffee Black 탐앤탐스 커피 블랙 ■ 위치: 필리핀 따가이따이, Ayala Malls-Serin 근처 ■ 주소: Tom N Toms Coffee, Silang Junction North Tagaytay City ⚝ 매장 방문 횟수: 1회(재방문 의사 없음) Tom N Toms Coffee Black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에 적힌 글은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으며,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업체 사정에 의해 영업 여부 및 메뉴 등이 변동되었을 수도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1983년, 마닐라공항에서 베니그노 아키노 2세(니노이 아키노) 사망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1983년, 마닐라공항에서 베니그노 아키노 2세(니노이 아키노) 사망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9월 15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필리핀에서 민주화 운동을 이야기하면서 니노이 아키노(베니그노 아키노 2세) 를 빼놓기란 대단히 어렵다. 필리핀의 제11대 대통령인 코리 아키노(코라손 아키노)의 남편이자, 제15대 대통령인 노이노이 아키노(베니그노 아키노 3세) 대통령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는 필리핀 민주주의 운동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니노이 아키노는 감옥에서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을 하면서까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독재 정권에게 저항했지만, 마르코스의 독재는 멈추지 않았다. 1980년에 니노이 아키노는 심장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가야만 했는데, 1983년 8월 21일 조국 필리핀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닐라 공항에서 암살당했다. 하지만 그의 희생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니노이 아키노의 죽음 이후 필리핀 민주화 운동이 드디어 열매를 맺었으니 하는 이야기이다. 베니그노 아키노 2세 니노이 아키노 베니그노 시미온 니노이 아키노 주니어 · 본명: Benigno "Ninoy" Simeon Aquino Jr. · 1932년 11월 27일 출생~1983년 8월 21일 사망 · 필리핀 민주화 운동의 주역 1932년 11월 27일의 일이다. 앙헬레스 위쪽에 있는 딸락(Tarlac)의 컨셉션(Concepcion)에서 아이가 하나 태어났다. 부유한 정치가 가문으로 유명했던 아키노 가문의 귀한 아들이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 대통령의 혁명군 장군이었던 할아버지와 KALIBAPI 정당의 사무총장이었던 아버지(베니그노 아퀴노 시니어) 아래에서 아이의 유년 시절은 즐겁게 지나갔다. 하지만 아이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전 세계가 열병과 같은 전쟁으로 뜨겁던 때였다. 아이는 아테네오 대학(Ateneo de Manila University)을 다니고 있었지만, 학교를 그만두고 세상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열일곱의 나이였지만, '마닐라 타임즈' 신문사에 취직하여 최연소 종군기사로 한국 전쟁에 대한 기사를 썼다. 그는 대통령상을 받을 정도로 기자로서의 재능을 보였지만, 신문사를 그만두고 정치에 뛰어든다. 그리고 정치 명문가 출신답게 곧 화려한 정치 기록을 세운다. 1955년 선거에 나가 불과 22살의 나이에 고향인 딸락 주의 콘셉시온(Municipality of Concepcion)의 시장으로 당선된 것이다. 그리고 27세엔 부지사, 29세엔 도지사, 34세엔 상원의원으로 선출되면서 계속하여 최연소 당선 기록을 세웠다. 정치 혼란기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빠르게 정치판에 입문하게 된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독재자 마르코스 대통령에게는 자신의 정권에 대한 끊임없는 비평을 일삼던 젊은 정치인은 눈엣가시에 불과했다. 마르코스 대통령의 정치적 탄압이 시작되었고, 결국 그는 50세의 나이에 암살당하게 된다. 필리핀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에게 저항하며 수없이 많은 일화를 남긴 남자, 이 남자의 이름은 바로 니노이 아키노(베니그노 아키노 2세)다. 니노이 아키노(베니그노 아키노 2세) 필리핀 민주화 운동 1972년 9월 21일의 일이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마저 탄압하는 유례없는 폭정이 시작된 것이다. 마르코스는 계엄령 선포와 함께 니노이 아키노를 체포하는데, 살인 및 불법 총기 소지가 체포 혐의였다. 니노이 아키노는 무려 7년간 감옥에 수감되게 되지만 감옥 안에서도 마르코스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40여 일이 넘는 목숨을 건 단식 투쟁으로 부정 선거에 항의했는데, 1975년에 이르러 굶주림으로 아사 직전에 직면했음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아키노에 대한 재판은 계속되었고, 1977년에 군사위원회에서는 니노이 아키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게 된다. 하지만 다음 해에 아키노는 감옥에서 필리핀 의회 선거 출마까지 감행하게 된다. 니노이 아키노는 1978년 선거에서 패했지만, 선거 후 사형선고는 취소된다. 1980년의 3월은 니노이 아키노에게 더욱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니노이 아키노는 감옥에서 심장 발작을 일으켰는데, 병원(Philippine Heart Center)으로 이송되었지만 수술을 받기란 쉽지 않았다. 의료진 측에서 수술에 대한 부담으로 진료를 꺼린 것이다. 니노이 아키노 입장에서도 마르코스가 어떤 술책을 쓸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니노이 아키노는 마르코스에게 심장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갈 수 있게 되기를 청했고, 마르코스는 자신의 정권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니노이 아키노의 출국을 허락한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아키노는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망명을 하게 되는데, 병원 치료를 받으면서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집회 참석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마르코스와의 약속에 대해 "악마와 맺은 약속은 약속으로 볼 수 없다(a pact with the devil is no pact at all)"고 하면서 필리핀의 민주화를 위한 강연과 연설을 멈추지 않았다. 니노이 아키노(베니그노 아키노 2세) 우리가 가진 적이 없는 가장 위대한 대통령 1983년 8월, 여의도에 6.25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만남의 광장' 만들어졌다고 대한민국이 들썩이던 그때 필리핀 역사에 있어 지울 수 없는 큰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니노이 아키노는 미국에 있었지만, 조국인 필리핀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당시 그는 자신이 필리핀 땅을 밟는 순간 감옥에 투옥되거나 살해당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키노는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리고 1983년 8월 21일, 니노이 아키노는 귀국 길에 공항에서 암살당한다. 마르코스 정부에서 파견한 경호원이 지켜보고 가운데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저격범이 쏜 총알에 머리를 맞아 사망하게 된 것이다. 니노이 아키노가 마닐라공항에서 암살당했다는 소문은 빠르게 필리핀 국민들에게 퍼졌다. 당시 마르코스 정부는 암살범과의 연관성을 부인했으나 어린아이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리고 니노이 아키노의 죽음으로 필리핀은 대혼란으로 빠졌다. 아키노의 묘소는 퀘존 시티에 있던 그의 집에서 마련되었는데, 아키노의 가족들은 아키노의 총상 자국을 숨기지 않았다. 장례식이 있는 8월 31일까지 아흐레 동안 수천 명의 사람이 아키노의 피 묻은 몸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무더운 공기가 가득 차 있던 그해, 니노이 아키노의 장례식이 있었던 8월 31일은 유난히 무덥고 습기가 높았다고 전해진다. 퀘존의 산토 도밍고 교회(Santo Domingo Church)에서 있었던 아키노의 장례식을 보고자 2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애석하게 죽은 고인을 추모하며 사람들은 퀘존에서부터 리잘 공원까지 행진했고, 마르코스를 규탄하며 독재 정부의 퇴진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 일은 필리핀 민주화의 시발점 이 됐다. 하지만 정치적 혼란은 사라지지 않았고, 필리핀 민주화운동이 갈 길은 멀기만 했다. 그가 암살당하고 난 뒤에도 3년이나 지나서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21년 동안의 장기독재를 접고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𖠿 관련 글 보기 필리핀 역사: 1986년, 마르코스의 독재를 몰아낸 피플 파워 혁명(EDSA 혁명) 필리핀 역사: 피플파워혁명 이후 필리핀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된 코리 아키노(코라손 아키노) 비행기에서 내리기 직전 아키노의 모습(좌) 총탄에 쓰러진 모습(우) - 사진 출처: Presidential Museum and Library PH 니노이 아키노 암살 당시의 기록 (출처 : Mr & Ms, American Historical Collection, Rizal Library, Ateneo de Manila University ) 니노이 아키노 장례식. 그를 추모하려고 몰려든 사람들 (이미지 출처 : Presidential Museum and Library ) 필리핀 마닐라공항 터미널1. 니노이 아키노가 암살당한 곳은 터미널1의 11번 게이트 주변이라고 한다. 니노이 아키노의 죽음은 민중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마닐라공항의 정식 이름은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이다. 필리핀 정부에서는 필리핀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였던 니노이 아키노를 기리기 위해 '마닐라공항'의 이름을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으로 바꾸었다. 마닐라 마카티에 있는 니노이 아키노 기념 동상. 아키노가 마닐라공항에 도착한 직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동상은 아얄라 트라이앵글 공원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다. Ayala Avenue와 Paseo de Roxas 모퉁이에 있다. 니노이 아키노와 그의 부인 코리 아키노. 코리 아키노는 이후 필리핀의 대통령이 되었다. 필리핀 정부에서는 그가 암살당한 8월 21일을 공휴일(Ninoy Aquino Day)로 삼고 있다. EDSA 피플 파워 혁명 기념조형물(EDSA People Power Monument)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Malacañang Palace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잔인한 4월,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잔인한 4월,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9월 27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을 묘사한 디오라마 - 야얄라 뮤지엄(Ayala Museum) 소장품 바탄 죽음의 행진 Bataan Death March 1942년 4월 9일 ~ 1942년 4월 17일 바탄 전투(Battle of Bataan) 가 끝난 뒤 필리핀인 66,000명과 미국인 10,000명이 일본의 전쟁포로가 되었다. 7만 명이 넘는 전쟁포로가 나올 것을 예상하지 못한 일본에서는 딸락 카파스에 있는 캠프 오도넬(Camp O'Donnell)을 포로수용소로 사용하기로 한다. 그리고 약 76,000명에 달하는 전쟁포로를 포로수용소까지 걸어서 이동하도록 했다. 바탄에서 딸락의 캠프 오도넬의 수용소까지 대체 몇 km를 걸었는지와 이동 중 몇 명이나 되는 이가 목숨을 잃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마리벨레스(Mariveles)에서 Orion, Balanga, Orani, Layac, Guaga를 지나 팜팡가의 산페르난도(San Fernando)까지, 그리고 카파스(Capas)에서 캠프 오도넬까지 대략 100km를 걸었으리라 생각될 뿐이다. 그리고 견디기 힘든 이 잔혹한 행군에서 최소 1만 명이 굶주림과 탈진, 말라리아 감염으로 사망 했으리라 추측된다. 필리핀에서 4월은 가장 덥다는 계절이 된다. 전쟁포로가 된 사람들은 4월의 숨 막히는 더위 속에서 100km 넘는 거리에 있는 포로수용소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식량은 고사하고 물조차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길을 걷는 동안 일본군은 잔혹한 가혹행위를 계속했다. 질병과 탈수로 지친 포로를 구타하고, 대열을 이탈한 낙오자는 총검으로 살해했다. 바탄 반도 끝의 마리벨레스에서 산페르난도까지 약 88km를 도보 이동한 뒤에 산페르난도에서 카파스(Capas)까지는 열차를 이용하게 했다고 하지만 박스카(Boxcar) 열차가 휴식이 되지는 못했다. 물도 마시지 못하는 상황에서 의자는 바라지도 않았겠지만, 4월의 햇살 속에서 뜨겁게 달아오른 열차는 그 자체가 고문이었다. 그리고 카파스에 도착한 뒤에는 캠프 오도델까지는 다시 약 13km의 악몽 같은 도보 행군이 이어졌다. 그런데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을 마치고 캠프 오도넬에 도착한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전혀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열악한 환경의 포로수용소였다. 캠프 오도넬의 포로수용소는 만 명 규모의 수용 인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본군은 약 54,000명의 인원을 한꺼번에 수용소에 집어넣고 학대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굶주림과 질병, 포로 학대 등으로 매일 수백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결국 1943년 1월 캠프 오도넬이 폐쇄될 때까지 오도넬 수용소의 포로는 절반 가까이 사망했다. 1942년의 그곳은 포로수용소라기보다는 지옥이었다. 한편, 일본군은 캠프 오도넬을 폐쇄한 뒤 포로들을 누에바에시하의 카바나투안 포로수용소로 이동시켜 포로 생활을 하게 했다. 포로로 잡힌 이들 상당수는 다른 수용소로 분산되어 수용되었지만, 포로 학대는 계속되었다. 수용소를 옮기는 과정에서도 사망자가 속출했지만, 전후 일본은 전범 재판에 나와 포로가 죽을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𖠿 관련 글 보기 필리핀 역사: 1942년, 바탄 반도를 피로 물들인 바탄 전투(Battle of Bataan) 필리핀 역사 유적지: 바탄 죽음의 행진과 사맛산 십자가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 .pdf PDF 다운로드 • 549KB 바탄 죽음의 행진 표지석 바탄 죽음의 행진 표지석 바탄 죽음의 행진 표지석 바탄 죽음의 행진 표지석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The National WWII Museum: Battle of Bataan · The National WWII Museum: Bataan Death March Survivor Lester Tenney Dies at Age 96 · National Museum of the U.S. Air Force: Imperial Brutality: Bataan Death March · National Museum of the U.S. Air Force: Bataan Death March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Bataan Death March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제헌의회 소집과 바라소아인 성당에서의 말로로스 헌법 비준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제헌의회 소집과 바라소아인 성당에서의 말로로스 헌법 비준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9월 20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불라칸 바라소아인 교회(Barasoain Church)에 있는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동상 1899년 1월 23일,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는 혁명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대통령 취임식까지 했지만, 그의 임기는 길지 못했다. 필리핀 제1공화국은 1899년 1월 21일부터 1901년 3월 23일까지 존재했을 뿐이다. 그런데 1899년 1월 21일과 1901년 3월 23일이란 날짜는 어떤 날짜일까? 우선 1899년 1월 21일 은 불라칸의 바라소아인 성당에서 필리핀 제1공화국의 기본법인 말로로스 헌법이 비준되었던 날짜이다. 그리고 1901년 3월 23일 은 1899년 필리핀 혁명 정부를 조직하여 필리핀 제1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올랐던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미군에게 체포된 날짜이다. 참고로 말라카냥궁 투어 중 테우스 맨션(Teus Mansion)의 필리핀 대통령 전시관에 가면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대통령 재임 기간을 1899년 1월 23일부터 1901년 3월 23일까지라고 적은 것을 볼 수 있다. 𖠿 관련 글 보기: 필리핀 역사: 필리핀 제1공화국의 존속 시기(1899년 1월 21일~1901년 3월 23일) 1899년 필리핀 제1공화국의 출범. 사진 출처: Presidential Museum and Library 말로로스 의회 Malolos Congress(Revolutionary Congress) 1898년 9월 15일 설립~ 1899년 11월 13일 해산 1898년 5월, 홍콩에서 망명 생활 중이던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마닐라만전투에서의 미군 승전 소식을 듣고 필리핀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1898년 6월 12일,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한다. 하지만 이 독립선언으로 필리핀이 실질적으로 독립국이 된 것이 아니었으니 필리핀 독립을 위해 갈 길은 아직 멀었다. 그런데 아기날도의 혁명정부에서는 미국이 필리핀의 독립을 도울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미국에서는 필리핀을 발판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고 하고 있었지만, 필리핀 혁명 정부에서 이런 미국의 속셈을 정확히 알기란 어려웠다.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필리핀 혁명정부는 불라칸 말로로스에 아시아 최초의 공화주의적 헌법제정을 위한 제헌의회를 소집했다. 1898년 9월 15일, 불라칸 말로로스의 바라소아인 교회(Barasoain Church)에서 소집된 혁명의회(말로로스 의회)의 의원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을 때 사용한 필리핀 독립선언서를 비준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1899년 1월 21일 필리핀 제1공화국의 기본법인 말로로스 헌법을 비준한다. 말로로스 헌법을 비준한 이틀 뒤인 1899년 1월 23일에는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필리핀 제1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필리핀-미국 전쟁(Philippine-American War) 중이던 1901년 3월 23일,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미군에게 잡히 면서 필리핀 제1공화국은 해체되어야 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필리핀-미국 전쟁이 끝났음을 선언한 것은 1902년 7월 4일이지만, 필리핀 제1공화국은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이미 사라졌다. 필리핀 제1공화국 말로로스 헌법 The Political Constitution of 1899(Malolos Constitution) 1899년 1월 21일 말롤로스 의회에 의해 비준된 말로로스 헌법은 스페인어로 작성되었으며, 펠리페 칼데론(Felipe Calderón)과 아기날도 정부에 외무부 장관을 지냈던 펠리페 부엔카미노(Felipe Buencamino)가 함께 초안을 작성했다. 1894년 산토 토마스 대학의 법과대학을 졸업한 펠리페 칼데론은 나중에 '필리핀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 말로로스 의회가 있었던 불라칸 말로로스의 바라소아인 교회(Barasoain Church) 필리핀 제1공화국 필리핀 제1공화국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Official Gazette: The 1899 Malolos Constitution · National Historical Commission of the Philippines: Malolos Congress · Senate of the Philippines: History of the Senate · Office of the Vice President of the Philippines: The History of the Philippine Vice Presidency - Chronology of Vice Presidents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유적지: 말라카냥 궁전의 대통령 박물관 투어 신청 방법(무료 가이드 투어)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유적지: 말라카냥 궁전의 대통령 박물관 투어 신청 방법(무료 가이드 투어)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10월 21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말라카냥궁에 있는 대통령 박물관을 견학하면 스페인 식민지 시절 지어진 궁전 건물이나 이멜다 마르코스의 구두 따위를 잔뜩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필리핀 역대 대통령의 행적을 볼 수 있도록 정리해 둔 안내물을 관람할 수 있는 정도이다. 역대 필리핀 대통령의 의복과 소품도 전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수가 많지는 않다. 지난 2023년 6월부터 말라카냥궁에서는 말라카냥 헤리티지 투어(Malacañang Heritage Tours)라는 이름으로 테우스 맨션(Teus Mansion)과 바하이 웅나얀(Bahay Ugnayan)를 대중에게 개방하여 관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필리핀의 초대 대통령인 에밀리오 아기날도 때부터 두테르테 대통령까지에 대한 자료는 테우스 맨션에서, 현직 대통령인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에 대한 자료는 바하이 우나얀에서 볼 수 있는데 이동 시간 및 대기 시간을 포함하여 두 곳 모두 돌아보는 것에 대략 한 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말라카냥 헤리티지 투어 Malacañang Heritage Tours 말라카냥궁에서 진행하는 대통령 박물관 투어 말라카냥궁 투어는 매주 화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진행되며 관람료는 무료이다. 워크인 방문도 가능하지만, 오전 9시와 오후 1시의 가이드 투어는 예약을 해야만 참여가 가능하다. 가이드 투어는 오전 9시와 오후 1시 2회에 걸쳐 진행되며, 회당 최대 25명까지 선착순으로 방문이 허가된다. 방문일로부터 최소 3일 전에는 투어 신청을 해야만 한다. ■ 비용: 무료 ■ 운영시간: 오전 9시 ~ 오후 4시(월요일 휴관) - 오전 9시, 오후 1시: 가이드 투어 진행 - 오전 10시, 오전 11시. 오후 2시, 오후 3시, 오후 4시: 예약 없이 워크인 방문 가능(가이드 없음) ■ 투어코스 - 테우스 맨션(Teus Mansion): 필리핀 역대 대통령 박물관 - 바하이 웅나얀(Bahay Ugnayan):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 홍보관 𖠿 관련 글 보기 필리핀 역사 유적지 - 말라카냥궁의 테우스 맨션(Teus Mansion)과 탄두아이 럼주 필리핀 역사 유적지 -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 홍보관, 말라카냥궁의 바하이 웅나얀(Bahay Ugnayan) ■ 비고 - 5세 미만은 관람 불가 - 복장 규정: 방문객 드레스 코드에 따라 민소매옷이나 슬리퍼 차림으로는 방문 불가 ■ 가이드 투어 예약하기: Tour Request Form ■ 투어 문의: Malacañang Heritage Mansions Management Center +63(02) 8249 8310 local 9009 or 8281 tours_mht@op.gov.ph 테우스 맨션(Teus Mansion) 바하이 웅나얀(Bahay Ugnayan)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Malacañang Heritage Tours: Malacañang Heritage Mansions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항공산업의 역사: 1937년, 마카티 닐슨공항이 문을 열다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항공산업의 역사: 1937년, 마카티 닐슨공항이 문을 열다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9월 1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필리핀 마닐라 마카티, 아얄라 애비뉴 (Ayala Avenue)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인해 전 세계가 흔들렸던 1930년대의 일이다. 많은 외국인이 낯선 땅에서의 성공을 꿈꾸며 필리핀으로 이주했다. 뉴질랜드 태생의 영국인으로서 알려진 닐슨(Laurie Reuben Nielson) 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1930년대 초반에 아내를 데리고 마닐라에 왔는데, 엄청난 비행기 애호가였다고 한다. 닐슨은 필리핀을 세계와 연결하기 위해서는 공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 했고, 필리핀에 항공학교를 세우고자 했다. 그리고 외국인 투자자의 참여를 끌어내는 데 성공하게 된다. 닐슨이 마닐라에 공항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가에 대한 기록은 상세히 남아있지 않지만, 어쨌든 그는 1876에 아얄라 가문(Zobel de Ayala)에서 설립했던 '아얄라 이 콤파냐(Ayala y Compana)' 라는 이름의 회사로부터 마카티에 있는 42헥타르(약 127,050평)의 땅을 임대하는 것에 성공했다. Iloilo-Negros Air Express Company에 제작했던 홍보 이미지(좌) / 닐슨 필드 에어포트(우) 1937년, 닐슨공항이 문을 열다. 토지 임대 계약을 마친 닐슨은 공항에 그의 이름을 따서 닐스 필드 에어포트(Nielson Field airport) 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바로 작업자를 구해 공항 건설 공사에 들어갔다. 공항을 짓기 위해 천여 명의 인부가 동원되었고, 30만 리터에 달하는 아스팔트가 사용되었다. 그는 공항 관제탑(Nielson Tower)의 디자인까지 매우 세심하게 신경을 썼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면 비행기 모양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공사 시작 6개월 만에 닐슨은 드디어 그가 꿈꾸던 공항의 문을 열게 되었다. 1937년 7월 의 일이었다. 닐슨은 PATCO(Philippine Aerial Taxi Company)와 INAEC(Iloilo-Negros Air Express Company)와 두 항공사를 대상으로 공항에서 민간 상업용 항공기 운항을 시작했다. 닐슨의 꿈은 완벽하게 성공하였으니, 그의 공항은 필리핀 국내 곳곳을 연결하는 공항으로서뿐만 아니라 필리핀을 세계와 연결하게 해주는 공항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가진 최고의 공항'으로 평가 받기로 했다. 하지만 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1941년 3월 15일부터 필리핀항공에서 마닐라-바기오 노선의 운항을 시작했지만, 전쟁이 시작된 마당에 상업용 민간 항공기 노선을 정상적으로 운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닐슨 공항은 곧 미군을 위한 공군 기지로 사용되게 되었고, 필리핀항공의 조종사는 미국 전투기 조종사를 호주로 대피시키는 업무에 투입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1941년 10월 상업 비행에 대한 전면 중단 조치 가 내려졌다. 그리고 1941년 12월 일본이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1942년이 되자 일본군이 필리핀을 침략했고, 공항은 이제 일본군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닐슨은 그의 가족과 함께 일본 당국에 의해 억류되기에 이르렀다. 전쟁 중 닐슨은 홍콩으로 억류되었지만, 그의 아내와 아들은 산토 토마스 대학에 있던 수용소로 옮겨지는 비극을 겪기도 한다. 전쟁이 끝나고 1946년이 되자 필리핀항공은 닐스 필드 에어포트(Nielson Field airport)에서의 비행 업무를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하지만 바로 항공기의 운항을 시작할 수는 없었다. 전쟁 중 손상된 공항 시설을 복구해야만 했다. 당시 돈으로 1백만 페소에 달하는 엄청난 비용을 들여 공항 시설의 복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기꺼이 큰 투자를 할 만큼 항공 산업의 장래는 밝았다. 닐슨공항의 시설이 복구되자마자 필리핀항공은 상업용 항공 서비스를 다시 시작 했고, 곧 국제선 노선까지 운항하기에 이른다. 여담이지만, 닐슨타워(Nielson Tower)는 그 뒤 관제탑이라는 원래의 목적과 완전히 동떨어진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경찰 파견대의 본부로 사용되기도 하고, 아얄라의 사무실로 사용되기도 했다. 1996년부터는 도서관(Filipinas Heritage Library)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도서관이 근처 아얄라 박물관(Ayala Museum)으로 옮겨진 뒤 고급 레스토랑으로 그 모습을 탈바꿈하게 된다. 아얄라 트라이앵글에 있는 블랙 버드 레스토랑(Blackbird Restaurant)이 바로 그곳인데, 지금도 고급 레스토랑으로 마카티 트라이앵글 공원을 지키고 있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해도 이곳이 예전에 공항 관제탑이었다는 것을 깨닫기 어렵지만, 그래도 닐슨의 흔적은 아직도 남아있다. 블랙 버드 레스토랑의 이름 자체가 미국 간첩 비행기였던 "SR-71 블랙버드" 항공기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현재 닐슨타워 건물은 레스토랑으로 이용되고 있다. 인테리어는 매우 고급스럽지만, 대신 음식 가격이 매우 비싼 편이다. 마카티 아얄라 트라이앵글에 있었던 닐슨 공항의 모습 ( 출처 : http://www.lougopal.com/manila/ ) 닐슨공항 관제탑 및 활주로의 모습 (사진 출처 : Pacific Wrecks ) Nielson Field airport (출처 : flickr ) 그 옛날 공항 자리가 요즘은 이렇게 바뀌었다. 이후 마카티는 필리핀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Wack Wack Country Club에서의 닐슨의 모습. 사진 왼편의 흰색 양복을 입은 사람이 닐슨이다. ( 출처 : http://www.lougopal.com/manila/ )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Filipinas Heritage Library https://www.filipinaslibrary.org.ph/ · Blackbird Restaurant 공식 홈페이지 http://www.blackbird.com.ph · Philippine History and Architecture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Philippine-History-and-Architecture-111131982293260/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유적지: 신석기 시대의 예술 작품, 앙고노 암각화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유적지: 신석기 시대의 예술 작품, 앙고노 암각화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9월 15일 앙고노 암각화 나이가 들면서 점점 공감하게 되는 말 중 하나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다. 실망하지 않으려면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되지만, 신석기 시대 필리핀에 살았던 이들의 그림을 볼 수 있다는 말에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시설이 생각보다 깨끗하여 흡족하였을 뿐, 그림 그 자체는 실망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굉장히 집중하여 봐야지만 보일 정도의 그림이었던 것이다. 관리인의 안내에 따르면 사람, 도마뱀, 개구리, 그리고 기하학적 모양의 그림을 볼 수 있다는데 착한 사람의 눈에만 동물 모양이 보이는 모양이다. 원과 선으로 구성된 형태 속에서 사람 모습으로 추정되는 그림만 비교적 또렷하게 보였다. 마닐라 교외에 있는 리잘주의 비난고난(Municipality of Binangonan) 지역에 가면 앙고노 암각화라는 장소가 있다.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된 예술 작품 이라는 앙고노 암각화는 1965년에 필리핀에서 유명한 예술가인 카를로스 프란시스코(Carlos Botong Francisco)가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집이 앙고노 쪽이라서 비난고난으로 하이킹을 나왔다가 우연히 신석기 시대 유물을 발견했다는 뭐 그런 이야기이다. 리잘의 비난고난 지역에 있지만, 발견자인 카를로스가 앙고노 출신이라 앙고노 암각화(Angono Petroglyphs)란 이름이 붙여졌다. 카를로스 프란시스코가 유적지를 발견했다고 신고를 한 뒤 필리핀 정부에서는 이 암각화에 대해 조사에 나섰고, 이 지역에서 발견된 179개의 그림을 신석기 시대 또는 기원전 2천 년 이전의 것으로 추정했다. 그림을 그릴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구와 도자기 파편까지 발견되면서 앙고노 암각화는 네그리토족과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이 도착하기 전, 석기 시대부터 인간이 집단을 이루어 거주했었다는 좋은 증거 가 되었다. 하지만 앙고노 암각화는 그 후 여러 고난을 겪어야 했다. 앙고노 암각화는 필리핀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고고학 유적지 중 하나이지만, 정부에서 관리를 게을리하고 방치한 사이 심하게 훼손되었다. 기원전 2~3천 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암각화에 낙서한다니 믿기 어렵지만, 누군가 와서 낙서하는 식의 일까지 계속 발생했다. 1973년, 필리핀 정부에서는 앙고노 암각화의 훼손을 막기 위해 문화재로 지정하고 고고학 유적지 보존에 나섰다. 앙고노 암각화 Angono Petroglyphs 앙고노 암각화를 보러 리잘에 간다면 이 그림이 신석기인이 그린 그림임을 고려하고 가야 한다. 뭔가 멋진 그림을 기대하고 가면 실망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마닐라에서 크게 멀지 않고 시설이 깨끗하여 데이투어로 가볼 만하다. 외진 곳에 있어서 대중교통으로는 방문이 어렵다. ■ 관람 시간 : 오전 9시~오후 5시(매주 월요일은 휴관) ■ 입장료 : 무료 ■ 주소 : Rizal, Binangonan 필리핀 리잘, 앙고노(Municipality of Angono) 앙고노는 히간데스 거인 축제로 유명한 곳이다. 빌리지에 들어갈 때처럼 이곳에서 방문지 확인을 한다. 앙고노 암각화를 보러 왔다고 말하면 방문을 허락받을 수 있다. 앙고노 암각화 입구 이곳 터널을 지나 잠깐 걸어야 한다. 짧은 터널을 지나, 잠시 상쾌한 숲길을 걸을 수 있다. 시설이 상당히 깨끗한 편이다. 자세히 보면 동물로 추정되는 무언가의 그림이 보인다.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National Museum of the Philippines: Angono Binangonan Petroglyphs · GMA Network: Angono petroglyphs, PHL’s oldest artworks, in danger of disappearing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1898년 이후 현재까지 필리핀 국기의 규격과 색상의 변화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1898년 이후 현재까지 필리핀 국기의 규격과 색상의 변화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9월 21일 필리핀의 국기는 위는 파랑, 아래는 빨강에 왼쪽에 흰색의 정삼각형에 태양과 3개의 별이 나와 있다. 국기의 가로세로 비율은 2:3인데 흰색 삼각형은 정삼각형으로, 정삼각형 변의 길이는 세로의 길이와 일치 한다. 또한 세 개의 별의 꼭짓점은 별의 중앙을 향해 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국기를 처음 도안했을 때만 해도 태양에 의인화된 얼굴이 그려져 있었으나 나중에 의인화된 특징을 없애고 광선을 단순하게 정리하였다. 국기 제작에 필요한 천 공급에 문제가 있어서 푸른색의 색상이 조금씩 변했지만, 1998년 공화국법(Republic Act. No. 8491)에 의해 오늘날과 같은 모습과 색상으로 정해졌다.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도안했던 국기 𖠿 관련 글 보기: 필리핀 역사: 필리핀 국기에 담긴 뜻 - 전쟁 시 국기의 붉은색이 위로 가는 이유 1898년 이후 필리핀 국기 모양의 변화 시기 국기 디자인 1898년~1901년 1901년~1907년 1919년~1936년 1936년~1941년 1941년~1945년 1985년~1986년 1998년~현재 필리핀 불라칸의 바라소아인 성당(Barasoain Church)에 비치된 필리핀 국기 관련 안내문. 이 성당에서 필리핀 제1공화국의 기본법인 말로로스 헌법이 비준되었다.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https://www.officialgazette.gov.ph/1998/02/12/republic-act-no-8491/ · http://malacanang.gov.ph/history-of-the-philippine-flag/ · https://news.mb.com.ph/2019/05/27/national-flag-days-start-today/ · http://nhcp.gov.ph/the-philippine-flag-symbol-of-our-sovereignty-and-solidarity/ · https://www.officialgazette.gov.ph/the-philippine-flag/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