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SEARCH RESULTS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공란으로 1690개 검색됨
- 필리핀 역사: 마닐라 타귁시티(Taguig City) 지명의 유래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마닐라 타귁시티(Taguig City) 지명의 유래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3월 1일 필리핀 마닐라. 타귁시청 Taguig City Hall 사전에서 격세지감이란 단어의 뜻을 찾아보면 '오래지 않은 동안에 몰라보게 변하여 아주 다른 세상이 된 것 같은 느낌'이라는 설명을 볼 수 있다. 이 설명의 뜻을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1970년대 타귁시티(Taguig City) 주변을 촬영한 사진을 보면 된다. 변변한 건물은커녕 도로조차 없어서 아무리 봐도 타귁시티로는 보이지 않는다. 요즘 보니파시오의 모습을 보면 상상도 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20년 전만 해도 높은 건물이라고는 하나 보기 어려운 동네였다고 한다. 실제 타귁시티가 고도로 도시화된 도시(HUC, Highly Urbanized City)로 분류 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4년 12월 8일부터이다. 그러니까 그전까지만 해도 행정구역상 시티가 아닌 무니시팔리티(Municipality of Taguig)였다. 그런데 타귁시티의 이름은 어떤 의미을 가지고 있을까? 타귁은 타갈로그어 mga taga-giik(threshers)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탈곡기를 뜻하는 타가기익(taga-giik)이 발음의 편의상 'Tagui-ig'가 되었다가 현재의 타귁(Taguig)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지금이야 화려한 도시 풍경이지만, 예전에는 대부분 농경지였을 터이니 지명의 유래는 쉽게 이해되지만, 타가기익이 어떤 모양의 탈곡기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타가기익(taga-giik)이란 것이 어떤 모양인지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아무리 검색을 해봐도 변변한 사진 자료 하 보이지 않았다. 겨우 워싱턴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다는 흑백사진을 한 장 찾았지만, 대체 어떻게 해서 벼 이삭에서 낟알을 떨어내는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좌우 양쪽으로 지지대를 만들고 양쪽에 긴 대나무를 걸쳐 손잡이를 만든 뒤, 이 손잡이를 잡고 발로 밟아 타작한 듯한데 정확하지는 않다. 농업과 관련된 사이트까지 죄다 뒤져봐도 정확한 설명이 없는 것이 타귁시티 인근에서만 이 탈곡기를 사용했을 뿐, 필리핀 전 지역에서 사용하던 것은 아니었다고 추측된다. 아쉬운 일이지만, 아무리 신기한 사진을 찍어도 유튜브나 틱톡에 올리지 못했을 100년 전에는 귀한 카메라를 들고 타귁시티까지 가서 농부들이 수확하는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둘 만큼 한가했던 이가 없었던 모양이다. taga-giik ⓒUniversity of Washington 타귁시티의 BCG는 보니파시오 글로벌 시티(Bonifcio Global City)를 의미한다. Bonifcio Global City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City Government of Taguig: ORIGIN OF THE NAME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일본 점령기(1942년~1945년)에 세워진 필리핀 제2공화국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일본 점령기(1942년~1945년)에 세워진 필리핀 제2공화국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8월 2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일본 점령기 1942년~1945년 기록에 따르면 클락의 하늘에서 일본 정찰기가 처음으로 발견된 것은 1941년 12월 2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닷새 뒤,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 전쟁(대동아 전쟁)을 시작 했다. 진주만 공습한 일본은 바로 태평양 지역의 미국 식민지이자 주요 거점이기도 한 필리핀에 대한 침공을 시작했다. 당시 일본은 태평양 지역의 미국 식민지이자 주요 거점이기도 한 필리핀을 침공하여 미국군이 필리핀을 작전의 전진 기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물자를 아끼지 않고 공세를 퍼부었다. 고무며 석유 등과 같은 물자는 전쟁을 위해 꼭 필요했고, 이런 물자를 일본으로 운송하기 위해는 재빨리 필리핀을 점령하여 해상 교통로를 확보해야만 했다. 1941년 12월 8일 클락공군기지에 대한 폭격을 시작으로 일본은 필리핀 침략에 나섰다. 이후 12월 22일 필리핀에 상륙한 일본군 주력군은 1942년 1월 2일 마닐라를 점령하는 것에 성공한다. 미국 육군극동사령부(USAFFE)는 마닐라를 무방비 도시(open city)로 선언하고 바탄 지역으로 후퇴하여 전쟁을 계속했지만,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 본토로부터 지원이 끊긴 상황 이라 바탄 전투(Battle of Bataan) 에서의 승리를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맥아더 사령관이 연합군 서남태평양 사령관으로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난 이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으나 결국 바탄에 이어 코레히도르섬까지 함락되었다. 1942년 5월, 맥아더의 뒤를 이어 사령관 자리에 올랐던 웨인 라이트 사령관은 일본에 항복하게 된다. 한편, 필리핀 자치령 코먼웰스(Commonwealth)의 대통령이었던 마누엘 케손 대통령은 일본의 필리핀 점령이 확실해지자 코레히로드섬(Corregidor island)으로 피신했다가 민다나오와 호주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1942년, 필리핀에 주둔했던 미군이 일본에 밀려 철수하자 일본은 일본 군정의 성립과 계엄령을 선포한다. 그리고 필리핀이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얻기 위한 준비기간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 필리핀을 점령한 일본의 군사 지배는 형식적이나마 미국으로부터 필리핀을 독립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일본에 협력하는 단체를 구성하고, 친일파를 모아 새로 의회를 만들고, 필리핀 독립준비위원회(PCPI)라는 이름으로 단체를 조직하는 이 모든 일이 불과 몇 달 동안 벌어졌다. 그리고 1943년 10월 14일, 일본은 호세 라우렐을 대통령으로 내세워 필리핀 제2공화국을 수립한다. 일본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허수아비 정부였다. 일본에서 친일 괴뢰정부를 통해 필리핀에 허울뿐인 '독립'을 부여하였던 동안 일본 점령기 내내 필리핀인들은 고문과 약탈, 강간 등과 같은 잔혹 행위를 겪어야 했다. 필리핀 전역에서 일본에 저항하는 게릴라전이 벌어졌지만, 미디어를 통제하고 학교에서 '일본의 가치와 정신'을 가르치는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에 협력하는 사람 또한 늘어났다. 전쟁으로 인해 주요 사회 기반 시설이 대부분 파괴되었고, 사회 혼란은 계속되었다. 마을 전체에 대한 학살이 전국에서 일어나 민간인이 한꺼번에 떼죽음을 당하는 일도 빈번했다. 일본의 점령은 태평양 지역 연합군 사령관이자 미 극동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이 레이테섬을 상륙하고 마닐라를 재탈환하는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대동아 전쟁)은 1945년 8월 미국이 원자 폭탄을 투하함으로써 끝이 났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은 USS 미주리 전함에서 맥아더 장군의 감독 하에 항복문서에 공식적으로 서명했다. 𖠿 관련 글 보기: 필리핀 역사: 1942년, 바탄 반도를 피로 물들인 바탄 전투(Battle of Bataan) 필리핀 역사: 잔인한 4월,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 일본 점령기에 발행되었던 1센타보 지폐, 밤반 제2차 세계대전 박물관(Bamban WWII Museum) 소장품 일본의 점령을 묘사한 디오라마 - 야얄라 뮤지엄(Ayala Museum) 소장품 마닐라 타귁시티의 Philippine Army Grandstand에 있는 Hunters ROTC 동상. Hunters ROTC는 일본 점령기 동안 항일운동을 한 게릴라 부대이다.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The National WWII Museum: Liberation of the Philippines 1945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유적지: 필리핀 독립 기념 국기게양대 - 1946년 독립기념일 행사의 장소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유적지: 필리핀 독립 기념 국기게양대 - 1946년 독립기념일 행사의 장소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9월 26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필리핀 마닐라 리잘파크, 필리핀 독립 기념 국기게양대(Independence Flagpole) 필리핀 마닐라에 와서 여행 중에 리잘파크(리잘공원)의 호세 리잘 기념비를 보러 갔다가 필리핀 국기를 보았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필리핀의 미국 식민지 시대 역사유적지에 다녀온 셈이 된다. 바로 그 국기가 있는 자리가 필리핀이 1946년 7월 4일 미국으로부터 독립했을 때 필리핀 국기를 게양한 위치이기 때문이다. 필리핀 독립 기념 국기게양대 Independence Flagpole ■ 위치: 필리핀 마닐라 리잘파크, 호세 리잘 기념비 근처 ■ 주소: Ermita, Manila, 1000 Metro Manila, Philippines 마닐라의 리잘파크까지 가도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알고 보면 리잘파크의 호세 리잘 기념비 앞에 있는 국기는 꽤 의미 있는 국기이다. 일단 이 국기게양대는 필리핀에서 가장 높은 깃대를 자랑한다. 하지만 필리핀 정부에서 리잘파크의 국기게양대를 매우 소중하게 관리하는 것은 그 높이보다 역사적 의미 때문이다. 1898년부터 1946년까지 이어졌던 미국 식민지 시대를 끝내는 날, 필리핀 정부에서는 미국의 성조기를 내리고 대신 필리핀 국기를 올리는 국기 게양 행사를 진행했다. 그런데 그때 바로 그 국기게양식을 진행한 자리가 바로 리잘파크의 필리핀 국기가 있는 자리이다. 𖠿 관련 글 보기: 필리핀 역사: 1946년 7월 4일, 미국으로부터 독립한 날 리잘파크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물론 세월의 흐름에 따라 국기는 물론 국기게양대 자체도 바뀌었다. 리잘파크의 국기게양대는 원래 45.72m 높이로 만들어졌었지만, 1995년 태풍으로 국기게양대의 높이가 조금 줄어들었다. 손상된 깃대를 수리하면서 32m로 높이를 줄인 것이다. 이후 바닥 조명 설치 등과 같은 몇 번의 개보수를 거쳐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참고로 대한민국에 국기의 게양·관리 및 선양에 관한 규정이 있는 것처럼 필리핀에도 필리핀 국기에 관한 법이 있는데 이 공화국법(Republic Act 8491) 에 따라 필리핀 독립 기념 국기게양대는 일 년 내내 24시간 국기가 게양된다. 매월 첫 번째 월요일 아침에는 국기 게양식 행사도 진행된다. 필리핀 독립 기념 국기게양대는 인트라무로스에 있는 발루아르테 데 산디에고(Baluarte de San Diego) 석조 요새에서도 보일 정도로 높다. 필리핀 마닐라 리잘파크, 필리핀 독립 기념 국기게양대(Independence Flagpole)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Official Gazette: Statement: DOT on the Rizal Park Independence Flagpole Project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공휴일의 의미와 유래: 바탄 죽음의 행진과 용사의 날(바탄 전투 기념일) - 4월 9일
필리핀 공휴일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공휴일 필리핀 공휴일의 의미와 유래: 바탄 죽음의 행진과 용사의 날(바탄 전투 기념일) - 4월 9일 ⚝ 저작권 안내 :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9월 23일 매년 4월 9일은 아라우 낭 카기팅안(Araw ng Kagitingan)이라고 부르는 필리핀 공휴일이다. 그런데 필리핀어 카기팅안(Kagitingan)을 한국어로 번역하기란 쉽지 않다. 영어로는 Day of Valor라고 적지만, 한국어로는 용사의 날, 용맹의 날, 용기의 날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바탄전투의 희생자를 기리는 날이라서 바탄 전투기념일(바타안 전투기념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주필리핀 대한민국 대사관에서는 휴무일 안내를 할 때 용사의 날(Araw ng Kagitinga)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용사의 날 Araw ng Kagitingan Day of Valor 공휴일 날짜: 매년 4월 9일 1942년 4월 9일, 미군이 일본에 항복하며 바탄 전투(Battle of Bataan) 가 끝났다. 바탄전투에서 약 76,000명의 군인이 살아남았지만, 이들은 모두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야만 했다. 일본군의 포로가 된 미국-필리핀 연합군은 바탄 마리벨레스에서 딸락 카파스에 있는 캠프 오도넬까지 100km 넘는 거리를 행군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최소 1만 명이 굶주림과 탈진, 말라리아 감염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이 비극적인 행군은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 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필리핀 정부에서는 바탄 전투가 끝난 날이자 바탄 죽음의 행진이 시작된 1942년 4월 9일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9일을 용사의 날(Araw ng Kagitinga) 공휴일로 정하고 각종 기념행사 및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용사의 날 주요 행사는 사맛산 바탄 전투 전쟁기념관(Mount Samat National Shrine) 에서 진행된다. 대한민국에서 현충일이 되면 대통령이 국립서울현충원을 방문하여 참배하듯이 필리핀에서도 용사의 날이 되면 필리핀 대통령과 정부 주요 인사가 사맛산에 가서 바탄전투의 희생자의 헌신에 경의를 표하고 추모의 뜻을 나타낸다. 가톨릭 국가답게 가톨릭 미사가 진행된다는 것만 제외하면 추념식은 한국의 현충일과 거의 비슷하게 진행된다. 2024년 행사는 용사의 날 82주년을 기념하여 참전 용사인 펠리시시마 델라 크루즈가 참석하여 종을 울리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한편, 필리핀에서 이렇게 바탄 전쟁의 희생자들을 국가 공휴일로 기리게 된 것은 지난 1961년부터이다. 당시 필리핀의 대통령이었던 카를로스 가르시아 대통령은 공화국법 제3022호(Republic Act No. 3022)를 통해 매년 4월 9일을 바탄의 날(Bataan Day)로 선포했다. 그 후 바탄의 날은 여러 번에 걸쳐 그 이름이 바뀌었는데, 1987년에는 Araw ng Kagitingan(Bataan and Corregidor Day)라고 칭하기도 했다. 필리핀 사람들이 아직도 4월 9일을 바탄 데이(Bataan Day) 또는 코레히도르 데이(Corregidor Day)라고 칭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이때의 기억 때문이다. 그러다가 베니그노 아키노 3세(노이노이 아키노)가 대통령이 되면서 공휴일 이름을 아라우 낭 카기팅안(Araw ng Kagitinga)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2011년 아키노 대통령이 서명한 휴일 관련 선언문(PROCLAMATION NO. 84)을 보면 2011년 4월 9일에 대해 아라우 낭 카기팅안(Araw ng Kagitinga)으로 선포한 것을 알 수 있다. 필리핀에서 용사의 날은 정규휴일(Regular holiday) 로 분류된다. 𖠿 관련 글 보기 필리핀 역사: 1942년, 바탄 반도를 피로 물들인 바탄 전투(Battle of Bataan) 필리핀 역사: 잔인한 4월,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 필리핀 역사 유적지: 바탄 죽음의 행진과 사맛산 십자가 바탄 죽음의 행진 표지석 사맛산 바탄 전투 전쟁기념관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Proclamation No. 84 · 주필리핀 대한민국 대사관: 대사관 휴무일 안내 (4.9-4.10) · RTVMalacanang: 82nd Anniversary of the Araw ng Kagitingan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유적지: 비간의 일로코스 박물관 단지 - 바씨 갤러리(Basi Gallery)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유적지: 비간의 일로코스 박물관 단지 - 바씨 갤러리(Basi Gallery)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10월 14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1807년에 일로코스 지에서 일어났었던 바씨 반란(Basi Revolt) 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필리핀 비간 시티(City of Vigan)에 있는 일로코스 박물관 단지(Ilocos Regional Museum Complex) 에 가면 된다. 바씨 반란과 관련된 14점의 유화를 통해 바씨 반란 때 어린 일이 발생했는지를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그림은 비간 출신의 화가인 에스테반 빌라누에바(Esteban Pichay Villanueva)의 작품으로 1821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바씨 반란의 과정을 시리즈로 만들어 표현한 유일한 작품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14점의 그림 시리즈 모두 2009년에 국가 문화재(National Cultural Treasures)로 지정되었다. 필리핀국립박물관에서는 일로코스 지역 전통술인 바씨(Basi)에 대한 전시실도 함께 운영하고 있어 바씨를 만들 때 쓰던 전통 도구와 함께 파타얀(Tapayan) 토기를 볼 수 있다. 일로코스 지방 박물관 단지 Ilocos Regional Museum Complex ■ 주소: Ilocos Regional Museum Complex, Burgos Street, Vigan City, Ilocos Sur ■ 위치: 필리핀 비간 / 일로코스주 의사당(provincial capitol building) 근처 ■ 운영시간: 오전 9시~오후 5시 / 월요일 휴관 ■ 입장료: 무료 일로코스 박물관 단지(Ilocos Regional Museum Complex) 바씨 갤러리(Basi Gallery) 바씨 갤러리(Basi Gallery) 바씨를 만들 때 쓰던 전통 도구 파타얀(Tapayan) 토기 파타얀(Tapayan) 토기 파타얀(Tapayan) 토기 스페인 식민지 시대 일로코스에서 일어났던 바씨 반란(Basi Revolt)에 대한 전시실 바씨 반란과 관련된 14점의 그림 시리즈 바씨 반란과 관련된 그림을 통해 바씨 반란의 모습을 좀 더 생생하게 볼 수 있다.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National Museum of the Philippines: The Basi Revolt · National Museum of the Philippines: Basi Gallery · National Museum of the Philippines: National Museum of the Philippines – Ilocos · Manila Bulletin: National Museum launches virtual edition of 'The Basi Revolt'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항공산업의 역사: 1948년, 닐슨공항 이전과 마카티 시티의 개발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항공산업의 역사: 1948년, 닐슨공항 이전과 마카티 시티의 개발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9월 1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Makati, Ayala Triangle Gardens 1945년의 1월, 전쟁은 도무지 그 끝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루손섬에서는 전투가 계속되었고, 민다나오섬을 비롯한 다른 섬에서의 저항도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힘겨웠던 시절도 끝이라는 것이 있었다. 1945년 9월 2일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 약 3천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 희생자 수를 기록해야만 했던 가혹한 전쟁이었다. 하지만 삶은 전쟁 이전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마닐라는 폐허가 되어 있었으니, 모두가 힘을 모아 도시 재건을 외쳐야만 했다. 공항 이전과 마카티 시티의 개발 아얄라 가문은 말라떼와 에르미타 등 마닐라 도심 지역이 완전히 파괴된 것을 보고 새롭게 마닐라 도심에 주택가와 금융센터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아얄라 가문에서 마카티를 상업지구로 만들 계획을 세우던 중에 닐스 필드 에어포트(Nielson Field airport)가 미군 비행장이었던 니콜스 필드(Nichols Field)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그리고 닐슨 공항이 니콜스 필드로 이전함에 따라 아얄라 트라이앵글 주변의 토지가 다시 아얄라로 반환 되었다. 아얄라에서는 제어탑(Nielson Tower)과 여객터미널 시설만 제외하고 공항 시설의 대부분을 마카티 시티의 개발에 활용 하기로 하는데, 공항 활주로 중 기본 활주로는 현재의 아얄라 애비뉴(Ayala Avenue) 도로로, 보조 활주로는 현재의 파세오 데 로하스(Paseo de Roxas) 도로로 전환되는 식이었다. 비즈니스 및 상업 지구로서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게 된 것이다. 무척이나 많은 변화가 한꺼번에 일어났던 시기였다. 필리핀의 제5대 대통령이었던 마누엘 로하스(Manuel Acuna Roxas) 대통령은 1946년부터 1948년까지 그의 재임 기간 중 전후 복구 사업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공항에 대한 복구도 잊지 않았다. 로하스 대통령은 닐슨 공항을 대신할 새로운 공항 건설을 명령하였고, 1948년에 마닐라공항은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된다. 마카티를 떠나 지금 마닐라공항의 자리로 공항을 옮기게 된 것이다. 파라냐케와 파사이 시티 사이 경계선 쪽이 신공항 후보지로 거론된 것은 공항 활주로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부지를 마련할 수 있으며, 지형이 평평하여 비행기가 이·착륙하기에 적당하다는 이유였다. 당시만 해도 70여 년이 흐른 뒤 마닐라공항이 '최악의 공항'이라고 불릴 정도로 혼잡해지리라는 것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𖠿 관련 글 보기: 필리핀 항공산업의 역사: 1935년, 필리핀 최초의 상업용 공항 개항 필리핀 항공산업의 역사: 1937년, 마카티 닐슨공항이 문을 열다 필리핀 항공산업의 역사: 1941년, 필리핀항공은 왜 바기오 노선부터 상업 비행을 시작했을까? 마닐라 마카티. 아얄라 트라이앵글 공원 지역. 예전에 공항이 있었다는 흔적은 관제탑 건물(블랙 버드 레스토랑)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 1949년도에 그려진 마닐라공항 스케치 (출처 : http://www.lougopal.com/manila/ ) 아얄라 트라이앵글 가든 - Makati, Ayala Triangle Gardens Makati, Ayala Tower One Makati, Ayala Tower One Makati, Insular Life - Ayala Avenue Makati, Teleperformance Center Ayala Makati, Teleperformance Center Ayala 필리핀 마닐라 마카티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Filipinas Heritage Library https://www.filipinaslibrary.org.ph/ · Blackbird Restaurant 공식 홈페이지 http://www.blackbird.com.ph · Philippine History and Architecture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Philippine-History-and-Architecture-111131982293260/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사람들은 왜 산토니뇨 아기 예수상에게 기적의 힘이 있다고 믿게 되었을까?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필리핀 사람들은 왜 산토니뇨 아기 예수상에게 기적의 힘이 있다고 믿게 되었을까?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9월 26일 산토니뇨 아기 예수상 필리핀 사람들은 왜 산토니뇨(Santo Niño) 아기 예수상에 기적의 힘이 있다고 믿게 되었을까? 산토니뇨의 기원은 무려 마젤란 시대로 올라간다. 필리핀 역사에 따르면 포르투갈 출신의 항해가 페르디난드 마젤란 이 필리핀에 도착한 것은 1521년 3월 16일이라고 전해진다. 조선에서는 중종(1488~1544)이 신진사림의 핵심 인물들을 몰아내어 기묘사화를 일으켰던 그해, 에스파냐(스페인)의 국왕 카를 5세 의 후원으로 5척의 배와 270명으로 된 선단을 이끌고 스페인에서 출발한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대서양을 횡단하여 필리핀에 도착했다. 하지만 마젤란의 항해는 쉽지 않았다. 거친 바다 위에서 극한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1519년에 에스파냐에서 출발한 마젤란은 1521년이 되어서야 필리핀에 도착했는데, 침략과 선교를 동시에 하던 당시 스페인의 방식에 따라 열심히 원주민에게 신앙을 전파하며 개종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세부섬 토착 왕국의 통치자(Rajah)였던 라자 후마본(Rajah Humabon)과 손을 잡고, 후마본의 정적이었던 막탄섬 지도자 라푸라푸(Lapu-Lapu)를 죽이겠다고 약속함으로써 필리핀에서의 지지 세력을 다져나갔다. 덕분에 라자 후마본은 필리핀에서 최초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으며, 신하 800명까지 세례를 받게 되었다. 마젤란은 라자 후마본의 아내인 하라 아미한(Hara Amihan, 후에 후아나)에게 산토 니뇨 성상을 선물하기도 하고 제법 잘 지내는 듯 보였지만, 라푸라푸를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전투에 임하다가 막탄전투(Battle of Mactan) 에 전사하게 되었다. 당시 후아나 여왕에게 아기 예수상의 모습이 어떻게 보였을지는 모르겠지만, 마젤란이 죽고 스페인 원정대가 필리핀에서 철수하였던 동안 필리핀 최초의 가톨릭 신자들은 아기 예수상을 그들의 신앙의 중심으로 모셨다. 막탄 전투에서 살아남은 마젤란의 부하들은 남은 배 한 척을 이끌고 스페인으로 돌아가 필리핀에 도착했었으며 마젤란은 죽었지만 그래도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세계 일주를 완성했음을 왕에게 보고했지만 스페인의 왕이 먼 동양의 나라까지 다시 원정을 보낼지 결정하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다가 마젤란이 죽고 40여 년의 시간이 훌쩍 지난 1565년,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 가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 의 지원을 받아 필리핀 원정에 나섰다. 마젤란과 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던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는 세부에 도착하자마자 마을을 포격했다. 그런데 불에 타서 무너진 오두막에서 기적적으로 손상되지 않은 산토니뇨(아기 예수상)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날 원주민들은 불탄 오두막 속에서도 남아있던 아기 예수상을 위해 북소리에 맞춰 춤을 추었는데, 이것이 세부 시눌룩 축제(Sinulog Festival) 의 기원이라고 한다. 시눌룩 축제가 생겨나기 전에도 세부 지역의 원주민은 북소리에 맞춰 영적 존재를 기리는 춤을 추었다고는 하지만, 후세 사람들이 지금처럼 비바 산토니뇨(Viva El Sto. Niño)를 격렬하게 외치게 되리라고는 짐작조차 못 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사건 이후 필리핀 사람들은 산토니뇨를 기적과 신앙의 상징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 이야기는 모두 아는 바대로이다.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는 세부를 점령했지만 향신료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부하들을 마닐라로 보내 정복하도록 했다. 1571년, 레가스피는 마닐라로 올라와 필리핀 제도는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선언한 뒤 필리핀의 초대 총독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필리핀은 1571년부터 1898년까지 긴 시간 동안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어야 했다. 𖠿 관련 글 보기: 필리핀 축제: 마닐라에서 산토 니뇨를 외치다 - 톤도 락바야 페스티벌(Lakbayaw Festival) 산토니뇨 아기 예수상 필리핀 톤도 락바야 페스티벌 Lakbayaw Festival 필리핀 톤도 락바야 페스티벌 Lakbayaw Festival 비바 산토니뇨(Viva El Sto. Niño)!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Aleteia: How the Santo Niño became the Philippines’ most popular devotion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와 카를로스 1세(카를 5세)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와 카를로스 1세(카를 5세)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2월 28일 마닐라 마카티의 아얄라 박물관(Ayala Museum)에 전시된 범선의 모형 업무 스트레스가 상당히 심하다는 자리가 왕의 자리이다. 그런 왕의 자리에서 일만 아는 일벌레로 살면 장수하기 힘들 것 같지만, 오스트리아의 왕실을 거의 600년 동안 지배하였다는 합스부르크가 왕가 출신의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는 고희의 나이까지 살았다. 당시 평균 수명으로 보았을 때는 상당히 장수한 셈이다. 펠리페 2세(Felipe II) 펠리페 2세 Felipe II 1527년 3월 21일 출생~ 1598년 9월 13일 사망 스페인 최전성기의 스페인 국왕 필리핀의 국명은 펠리페 2세에서 유래함 펠리페 2세는 조선에서 연산군의 뒤를 이어 중종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시기(1527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선조 31년(1598년)에 죽었는데 왕위를 물려주기 전까지 거의 궁정에 틀어박힌 채 서류 정리에 집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의 최강국 에스파냐(영어식 국명은 스페인)가 해가 지는 국가가 되어 버린 원인 중 하나로 펠리페 2세가 종교 전쟁을 위한 서류에 마구 서명했다는 것을 꼽을 정도이다. 펠리페 2세는 1556년에 아버지 카를 5세(카를로스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1598년 죽기 전까지 에스파냐 왕으로 재위했는데, 그가 통치했을 당시 에스파냐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릴 만큼 황금시대를 보낼 수 있었다. 독실한 가톨릭교도였던 펠리페 2세는 로마 가톨릭을 통한 국가 통합을 추구하였는데, 하루 14시간 이상을 집무실에서 보낼 정도로 성실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성실한 왕에게서 5척의 배를 지원받아 원정을 떠난 이가 바로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 이다. 1565년 필리핀에 도착한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Miguel Lopez de Legazpi, 1502년~1572년)는 세부 지역을 기반으로 필리핀 정복에 나섰다. 하지만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는 1571년이 되어서야 펠리페 2세에게 필리핀을 정복했다고 보고할 수 있었다. 하지만 7개의 바다를 지배하며 에스파냐의 황금시대를 이끈 절대군주라고 해도 암을 이길 수는 없었다. 펠리페 2세는 동남아시아에 있는 7천 개의 섬나라를 식민지로 삼아서 필리핀(Philippines) 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한 뒤 엘 에스코리알 궁전에서 사망했다. 카를 5세(Karl V) 카를 5세 Karl V(Charles V) 스페인에서의 명칭은 카를로스 1세( Carlos I) 1500년 2월 24일 출생~1558년 9월 21일 사망 ‘해가 지지 않는 해양제국’ 스페인의 통치자 에스파냐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카를로스 1세)는 1500년에 태어나 1558년 사망했다. 중세 유럽에서 가장 많은 국가의 왕관을 쓴 인물로 평가되는 카를 5세는 무려 17개나 되는 왕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근친결혼이 불러오는 유전적 결함을 이야기할 때 꼭 거론되는 이 왕은 합스부르크 왕가 가문 특유의 유전병인 주걱턱 현상으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하는데, 말년에는 심한 통풍으로도 고생했다고 한다. 카를 5세는 성인이 되기도 전인 1516년에 에스파냐 국왕의 자리에 올랐는데, 1556년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카를 5세가 가졌던 신성로마제국의 왕위는 동생인 페르디난드 1세에게 주어졌지만, 에스파냐의 왕위는 아들이었던 펠리페 2세(Felipe II)가 물려받았다. 필리핀 국기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National Quincentennial Committee: Philippines First Circumnavigation Map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5페소 지폐와 캠프 아기날도까지,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흔적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5페소 지폐와 캠프 아기날도까지,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흔적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9월 23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필리핀 생활을 하다 보면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좋든 싫든 그의 흔적을 수시로 볼 수 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필리핀 국기를 도안했으니 말이다. 필리핀 국가인 루팡 히니랑(Lupang Hinirang) 역시 그가 1898년 6월 12일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했을 때 훌리안 펠리페(Julian Felipe)에게 의뢰하여 만들었던 필리핀 국가 행진곡(Marcha Nacional Filipina)에서 유래한다. 화폐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그의 카비테 자택(스페인으로부터 독립선언을 했던 장소)은 1985년에 발행되었던 구권 5페소 지폐 도안으로 채택되었었다. 이 5페소 지폐는 현재 사용되지 않는다. 지명 - 필리핀군(AFP)의 총사령부가 있는 곳은 퀘존의 캠프 아기날도(Camp Aguinaldo)이다. 이곳은 원래 캠프 머피(Camp Murphy)라고 불렀지만, 1965년 서명된 공화국법 제4434호(REPUBLIC ACT No. 4434)에 따라 CGEA(Camp General Emilio Aguinaldo)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 카비테의 카윗에 가면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이름을 가진 '제너럴 에밀리오 아기날도'라는 이름의 동네가 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생가는 이 지역과 꽤 떨어져 있지만, 바일렌(Bailen)에서는 1965년 6월 19일 제너럴 에밀리오 아기날도(Municipality of General Emilio Aguinaldo)로 행정구역의 이름을 바꾸었다. 유적지 - 카비떼의 카윗(Kawit)에 가면 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Aguinaldo Shrine and Museum)을 관람할 수 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생가를 박물관으로 개조한 곳으로 이곳에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무덤도 있다. - 1898년도에 필리핀 제헌의회가 열렸던 불라칸 말로로스에 있는 바라소아인 성당(Barasoain Church)에 가면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관련된 자료가 가득한 1899년 공화국 박물관(Museo ng Republika ng 1899)을 관람할 수 있다. 𖠿 관련 글 보기 필리핀 역사: 친일파가 되었던 독립운동가, 필리핀의 제1대 대통령 에밀리오 아기날도 필리핀 역사 유적지: 불라칸 말로로스의 바라소아인 성당과 필리핀 제1공화국 박물관 필리핀 역사 유적지: 스페인로부터의 독립 선언을 했던 장소, 카비테의 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 카비테 카윗의 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Aguinaldo Shrine and Museum) 필리핀 말라카냥궁(Malacanang Palace)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REPUBLIC ACT No. 4434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따가이따이 맛집: 따알호수 근처, 탐앤탐스 커피 블랙
필리핀 맛집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맛집 필리핀 따가이따이 맛집: 따알호수 근처, 탐앤탐스 커피 블랙 ⚝ 저작권 안내 :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7월 28일 주차장에서 멀리 따알호수의 풍경을 볼 수 있다. 따가이따이에는 따알호수 주변으로 멋진 카페가 가득하지만, 장사가 잘되는 집이 얼마나 많을지는 알 수 없다. 스타벅스가 가장 손님이 많은 것은 거의 확실하지만, 2위는 글쎄, 어디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일요일이라 따가이따이(Tagaytay)에 드라이브를 나갔다가 탐앤탐스 커피 블랙(Tom N Toms Coffee Black) 에 방문했다. 따가이따이의 커피숍하면 스타벅스가 독보적인 인기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미 여러 번 가본 터라 매우 짐작이 가능한 풍경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올티가스 탐앤탐스의 단골답게 새로 문을 연 탐앤탐스에 가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지난 2024년 7월 13일에 문을 열었다는 따가이따이 탐앤탐스는 내게 딱 한 가지만 만족시켜 주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내 일요일 아침을 짐작 가능한 시간으로 채우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시 이곳 매장에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저희 아직 오픈 전인데요..." 가장 손님이 많을 일요일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매장은 아직 문을 열지 않고 있었다. 매장 바깥에 영업시간에 대한 안내문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만, 직원이 9시는 되어야 커피숍의 문을 연다고 했다. 그냥 돌아서려는데 직원이 아메리카노처럼 간단한 음료와 빵은 주문할 수 있다고 알려 왔다. 이곳 탐앤탐스는 호텔 조식 메뉴 비슷하게 식사에 가까운 메뉴도 많이 팔지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서 식빵으로 만드는 시나몬 브레드와 허니넛 브레드 두 가지만 주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메뉴판을 볼 수고를 할 필요도 없이 아메리카노 두 잔과 시나몬 브레드를 주문했다. 문제는 계산대에서 시작되었다. 가끔 친절하지만 큰 도움을 주지는 못하는 직원을 보게 되는데, 이곳 탐앤탐스 직원이 그런 타입의 사람이었다. 665페소가 나왔기에 천 페소를 내밀었더니 잔돈이 전혀 없다고 했다. 카드나 지캐시는 사용이 안 되고 현금만 받는 것이야 매장 정책이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거스름돈을 줄 잔돈 335페소가 없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근 문을 열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뭔가 매장 내 특별한 상황이 있는 것인지 그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잔돈이 없으니 정확한 금액을 가지고 와야 주문을 도와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왔다. 하지만 내 지갑에 665페소가 딱 맞추어 들어 있을 리가 만무하다. 결국 지갑을 뒤져 500페소를 찾아낸 뒤 커피 한 잔과 브레드 하나로 정확히 500페소를 만든 뒤에야 가까스로 주문을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매장 오픈 시간 전임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손님이 오가는 상황에서 직원이 흡사 속옷처럼 보이는 흰색 민소매 옷을 입고 커피머신을 만지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심각하게 느린 서빙 속도였다.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에 시나몬 브레드 하나 주는 것에 20분 이상 걸릴 일인지 모르지만, 한참이나 기다려도 커피는 나오지 않았다. 그럭저럭 간신히 커피를 받아 들고 165페소나 주기는 아까운 맛이란 생각을 하면서 마시는데 다른 손님이 속속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직 9시가 되려면 한참 남았는데, 이렇게 주문을 계속 받을 것이라면 매장 오픈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매장 문을 연 지 고작 보름밖에 되지 않아서 뭔가 정리가 덜 된 모양이었다. 어쨌든 한 가지만은 확실했으니, 나 외에는 모두 잔돈을 넉넉히 들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Tom N Toms Coffee Black Tom N Toms Coffee Black 탐앤탐스 커피 블랙 ■ 위치: 필리핀 따가이따이, Ayala Malls-Serin 근처 ■ 주소: Tom N Toms Coffee, Silang Junction North Tagaytay City ⚝ 매장 방문 횟수: 1회(재방문 의사 없음) Tom N Toms Coffee Black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에 적힌 글은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으며,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업체 사정에 의해 영업 여부 및 메뉴 등이 변동되었을 수도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