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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역사: 1992년, 피델 라모스 대통령 취임 -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 출신 대통령
⚐ 최종 업데이트:
2024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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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의 뒤를 이어 필리핀의 제12대 대통령이 된 피델 라모스 대통령은 필리핀군에서 소위부터 총사령관까지 모든 계급을 역임한 유일한 대통령이다. 개신교임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에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그는 위기 상황에 침착하게 대처할 줄 안다는 의미로 확고한 에디(Steady Eddie)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피델 라모스 대통령을 놓고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대통령이란 식의 설명을 하기도 하는데, 필리핀 한국 원정군(PEFTOK) 보병 정찰 소대의 소대장(소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그의 부대는 이리고지 전투 등에서 전공을 세워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부대 표창을 받기도 했다.
피델 라모스
· 본명: Fidel Valdez Ramos
· 1928년 3월 18일 출생~2022년 7월 31일 사망(94세)
· 필리핀 제12대 대통령
· 대통령 재임 기간: 1992년 6월 30일 ~ 1998년 6월 30일(6년)
-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 출신 대통령
-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과는 6촌 관계
- 마르코스의 독재를 타도하기 위한 피플 파워 혁명에 동참
어린 시절
피델 발데스 라모스(Fidel V. Ramos)는 팡가시난의 링가옌에서 태어났다. 피델 라모스는 다구판 옆에 있는 작은 소도시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나르시소 라모스)가 하원의원이자 외무부 장관을 지낸 덕분에 상당히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홈타운인 일로코스 노르테의 바탁 출신이다. 피델 라모스에 대해 마르코스 친척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어머니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 사촌 관계이다.
피델 라모스는 팡가시난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생 때부터 마닐라로 올라와 공부했는데, 미국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하며 군인으로서의 길을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육군사관학교와 일리노이 대학교를 졸업한 뒤 필리핀으로 돌아와 필리핀 육군에 입대한다. 그는 한국전쟁(6·25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며 군 경력을 쌓았다.
마르코스 계엄령 시기
1972년 9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 시기 피델 라모스는 마르코스의 독재 정권하에서 군 수뇌부로 지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반체제 인사 수천 명을 체포할 때 그걸 집행한 장본인이었던 셈이다. 그가 군참모총장 자리에 있을 때 토지개혁이 늦어짐에 항의하던 농민 18명이 학살되는 등의 크고 작은 참혹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1986년 피플 파워 혁명(EDSA 혁명)이 일어났을 때 피델 라모스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아닌 코라손 아키노 편에 선다. 그리고 자신의 6촌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를 대통령 자리에서 내쫓는 데 일조한다. 나중에 피델 라모스는 피플 파워 혁명에서의 자신이 한 일을 계엄령 때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한 속죄로 여겼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어떤 이유로 코라손 아키노 편에 섰는지는 몰라도 피델 라모스가 마르코스에게 등을 돌린 것이 EDSA 혁명의 성공에 힘을 실어준 것은 사실이다. 코라손 아키노는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EDSA 혁명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피델 라모스를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육군참모총장의 임무를 마친 뒤 피델 라모스는 1991년까지 국방부 장관으로 활동했다. 당시 국가 재난 조정 위원회 의장도 겸하고 있어 1991년 피나투보 화산 폭발 때 재난 처리에 나서기도 했다.
군인 출신 대통령
군대에서 37년을 보낸 뒤 피델 라모스는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리고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의 지지 속에서 필리핀의 제12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필리핀 대선 사상 최저치인 23%의 득표율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던 피델 라모스이지만 그는 대통령의 역할을 상당히 괜찮게 해냈다. 피델 라모스의 재임 기간은 평화, 안정, 경제 성장의 기간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군인 출신의 정치가로 큰 우려 속에 대통령 자리에 오른 피델 라모스는 규제 완화 및 자유화 정책을 통해 경제 살리기에 나선다. 외국인 투자를 강조하면서 무역을 개방하고, 소수의 대기업이 주도하는 주요 산업의 규제를 해제하는 등의 활동으로 빈곤율을 39%에서 31%로 줄이는 것에 성공한다. 개신교였던 피델 라모스는 가톨릭교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구 증가를 막기 위해 가족계획을 장려하고, 정부 지출을 줄이기 위해 공무원의 불필요한 해외여행 제한 등으로 관공서의 지출을 대폭 삭감했다. 이슬람 반군 조직과의 평화와 화해를 추구하여 모로민족해방전선(MNLF)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것도 주요 업적이다.
94세의 나이로 타계
2022년 7월 31일, 피델 라모스는 코로나 오미크론 변이의 합병증으로 마카티의 마카티 의료 센터에서 향년 94세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코로나 예방 접종을 했었지만 워낙 나이가 있는 데다가 심장질환을 앓았던 터라 합병증을 이겨낼 수 없었다. 사망 당시 필리핀 정부의 코로나19 사망자 관련 정책에 따라 피텔 라모스는 화장되어 타귁시티의 국립 영웅묘지(필리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한편, 생전에 피델 라모스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국립 영웅묘지 이장에 대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에 대한 모욕"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 Encyclopedia Britannica: Fidel Ramos
· Rappler: Fidel Valdez Ramos: The president who guarded democracy, broke monopolies, made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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