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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역사: 마젤란의 죽음과 라푸라푸를 필리핀의 영웅으로 만든 막탄 전투
⚐ 최종 업데이트:
2024년 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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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이 위대한 탐험가인지 아니면 침략자인지의 문제는 뒤로 하고, 그가 항해했었다는 경로를 보면 실로 대단하다. 당시 에스파냐(스페인)의 왕이었던 카를로스 1세(카를 5세)의 후원으로 270여 명의 선원과 함께 5척의 배를 끌고 1519년 스페인에서 출발한 마젤란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모두 건너 54,000km를 항해한 뒤 1521년 3월이 되어서야 필리핀에 도착했다. 하지만 마젤란이 필리핀에 머물 수 있었던 날을 계산해 보면 고작 2달도 되지 않는다. 1521년 4월 27일, 마젤란은 막탄섬을 통치하던 라푸라푸(Lapu-Lapu)와 벌였던 막탄전투(Battle of Mactan)에서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지난 2021년, 필리핀 문화예술위원회(NCCA)는 막탄섬을 통치하였던 라푸라푸(Lapu-Lapu)가 막탄 전투에서 승리한 날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누군가의 승리는 다른 이의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마젤란의 필리핀 발견은 침략이란 말과 동일 선상에 있다. 그러니 막탄전투에서의 승리 500주년이란 말은 페르디난드 마젤란(1480년 2월 3알~1521년 4월 27일)이 사망한 지 500년이나 지났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실 막탄섬을 지배하던 라푸라푸(Lapu-Lapu)의 입장에서 보면 갑자기 나타나 기독교로 개종하고 스페인에 충성하기를 강요한 마젤란이 침략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라푸라푸를 너무 얕잡아 보고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전투에 나선 것이 마젤란의 실수였다. 하지만 라푸라푸에게는 함께 싸울 1,500명의 사람과 전투를 효과적으로 끌어 나갈 전략이 있었다. 라푸라푸는 일단 막탄섬 얕은 해안에서 전투를 할 계획을 세웠다. 그렇지 않아도 얕은 해안에 바다에서 조수가 빠져나간 시간에 시작된 전투는 처음부터 마젤란에게 불리했다. 해수면이 낮아진 상태라 배를 해안에 댈 수 없었던 것이다. 라푸라푸는 스페인 병사들의 갑옷이 다리 부분까지 덮지 못했음을 약점으로 파악하고 공격을 시작했고, 라푸라푸의 전사들은 마젤란의 다리에 독이 묻은 화살을 맞추는 것에 성공한다. 전투에서 지도자를 잃은 병사가 전투를 계속할 의지를 갖기란 쉽지 않다. 마젤란을 잃은 스페인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막탄전투가 라푸라푸의 승리로 끝이 나면서 라푸라푸는 필리핀 영웅으로 기억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가 진짜인지는 알 수 없다. 당시의 역사가 모두 그렇지만 마젤란의 방문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래도 막탄전투의 상황은 마젤란의 사망 후 스페인의 세비야로 돌아왔던 안토니오 피가페타라는 인물이 쓴 기록으로 비교적 상세하게 내용이 알려졌다. 스페인 원정대의 생존자 입장에서 적은 글이기는 하나 필리핀 원주민의 반격에 대한 내용까지 담겨 있어 당시의 전투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𖠿 관련 글 보기: 1521년,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도착한 곳은 세부가 아닌 호몬혼섬
Philippine Revolution Web Central: The Battle of Mact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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