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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리핀 뉴스: 마닐라워터 수도국 단수 안내 - 파시그, 만달루용, 산후안, 퀘존 지역

    필리핀 뉴스와 정보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뉴스와 정보 필리핀 뉴스: 마닐라워터 수도국 단수 안내 - 파시그, 만달루용, 산후안, 퀘존 지역 ⚝ 저작권 안내 :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18년 8월 10일 마닐라워터(Manila Water) 메트로 마닐라의 그린힐스(그린힐즈) 등의 지역에 살고 있다면 8월 13일과 14일은 물 때문에 고생하지 않을까 싶다. 메트로 마닐라 동부 지역 100만 가구의 수도 공급을 담당하고 있는 '마닐라워터(Manila Water)' 수도국의 공지에 따르면 다음 주 월요일과 화요일 이틀 동안 파시그(Pasig City), 만달루용(Mandaluyong), 산후안(San Juan), 퀘존시티(Quezon City)의 일부 바랑가이 지역에 단수 조치가 있을 예정이라고 한다. 파이프라인 배관 공사로 인한 이번 단수 조치는 8월 13일 오후 7시부터 8월 14일 오전 9시까지 진행된다. 마닐라워터(Manila Water)에서는 이번 단수 조치로 33개 바랑가이 93,237가구가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안내하며, 수돗물 공급이 중단되는 동안을 위해 가정 내 미리 물을 받아두기를 권유했다. 한편, 수도관 파이프 공사 작업을 할 스타몰 주변으로 EDSA 도로의 일부 차선이 폐쇄될 예정이다. 마닐라워터 홈페이지에 올라온 수도관 공사 구역 안내. MRT Shaw Boulevard station 옆으로 메가몰 맞은 편에 있는 스타몰(Starmall EDSA SHAW) 주변이 공사지역이 된다. 이렇게 공사로 인하여 단수되었다가 공사 완료 후 처음 수돗물을 사용할 경우 녹물이 나올 수 있으니 잠시 수돗물을 흘려보낸 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마닐라 단수지역 만달루용(Mandaluyong) 산후안(San Juan) 파시그(Pasig City) 퀘존시티(Quezon City) Wack-Wack Mauway Addition Hills Highway Hills Malamig Buwayang Bato Barangka Ilaya Barangka Itaas Barangka Ibaba Barangka Drive Plainview Pleasant Hills Hulo Greenhills Addition Hills Little Baguio Pasadena Corazon De Jesus West Crame Ugong Oranbo Pineda Bagong Ilog Kapitolyo San Antonio Kaunlaran Bagong Lipunan Horseshoe Valencia Immaculate Conception San Martin de Porres Ugong Norte Pinagkaisahan 필리핀 마닐라에서 볼 수 있는 생수 자판기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마닐라워터 홈페이지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1945년, 마닐라 전투(Battle of Manila)로 10만 명의 민간인 사망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1945년, 마닐라 전투(Battle of Manila)로 10만 명의 민간인 사망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9월 27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마닐라 전투 Battle of Manila 1945년 2월 3일 - 3월 3일 1944년 12월 레이테 전투(Battle of Leyte) 를 마친 미국-필리핀 연합군은 신속히 루손섬으로 이동하여 클락을 되찾았다. 그리고 1945년 2월 3일부터 1945년 3월 3일까지 한 달 정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마닐라에서 일본군을 몰아내는 것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 마닐라 전투(Battle of Manila) 가 남긴 피해는 극심했다. 마닐라의 거리 곳곳에서 최악의 시가전이 벌어졌고,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그런데 마닐라 전투의 희생자는 군인뿐만이 아니었다. 전쟁이 극에 달하면서 필리핀에서 물러나야만 했던 일본군이 저지른 약탈과 파괴, 강간과 학살은 실로 잔인했다. 일본 퇴각군은 여성이나 아이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살해했 다. 마닐라 대학살(Manila massacre)로 수천 명이 한꺼번에 학살되고, 거리 곳곳에서 군인들의 무차별 강간이 자행되었다. 산티아고 요새(포트산티아고)와 라살대학교, 파코성당 등 시내 곳곳이 대학살의 현장이 되었다. 여성들은 마닐라 베이뷰 호텔(Bayview Hotel)로 끌려가 집단 강간을 당한 뒤 잔인하게 살해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일본군의 극악무도한 행위와 미군의 집중 포격으로 목숨을 잃은 무고한 희생자들 대부분은 제대로 된 무덤조차 갖지 못했다. 마닐라 전투가 끝난 뒤 미군은 마닐라 전투 에서의 약 천 명이 넘는 미군이 사망하였다고 발표했다. 필리핀인 민간인 희생자는 최소 10만 명. 전쟁 전 있었던 1939년 인구조사 에서 마닐라 지역 인구를 993,889명으로 파악했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마닐라 시민 10명 중 1명은 전쟁으로 사망한 셈이다. 게다가 마닐라 전투로 마닐라의 중요 건물과 도로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최대 격전지였던 인트라무로스는 산아구스틴성당 을 제외하고 인트라무로스에 있던 모든 성당을 잃어야만 했다. 중요한 정부 건물이 모조리 파괴되었고, 도로와 다리, 학교도 모두 불태워졌다. 상업 지역 역시 거의 100% 파괴되었다. 일본이 항복한 뒤 마닐라 전투에서 손상된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복구 작업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건물이 다시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파괴된 상태였다. 마닐라 전투로 폐허가 된 인트라무로스의 모습. 우측 상단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성당이 바로 산아구스틴성당(성어거스틴 성당)이다. Filipina Comfort Women - 아테네오 박물관(Ateneo Art Gallery) 소장품 마닐라 전투에서의 필리핀인 민간인 사망자 수는 최소 10만 명에 달한다.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INQUIRER: February 1945: The Rape of Manila · 인트라무로스 사진 출처: Destruction of the Walled City (Intramuros), 1945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마르코스 대통령과 필리핀 전통의상 바롱, 그리고 필리핀항공의 승무원복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마르코스 대통령과 필리핀 전통의상 바롱, 그리고 필리핀항공의 승무원복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0년 8월 9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필리핀 전통의상 바롱(Barong) 바람직한 일인지는 논외로 두고, 어느 시대에나 특권층은 있기 마련이다. 필리핀 식민지 시대에는 프린시팔리아(Principalía)라고 불리는 특권층이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원주민 중에서도 상류층을 골라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특권을 인정하고, 스페인 국왕에게 바치는 공물을 면제하는 등 생활에 있어 혜택을 제공하는 식민지 정책을 펼쳤다. 원주민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플랜테이션 대농장이 생겨났고, 필리핀 지배계층은 경제력과 지식을 모두 갖춘 이들에게 식민지 사회에서의 경제적인 지위와 발전을 약속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상당한 재력을 갖춘 중산층을 중심으로 일러스트라도(Ilustrado) 라고 부르는 계층도 생겨났다. 필리핀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호세 리잘(José Rizal) 도 일러스트라도 계급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호세 리잘이 대단한 부자는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있기도 하지만, 안과 전문의가 되고자 해외 유학을 다녀올 정도는 되었다. 프린시팔리아(Principalía)나 일러스트라도(Ilustrado) 등과 같은 특권층의 성장은 의류 시장의 성장을 불러왔다. 상류층의 부유한 경제력은 고급 의류의 비용을 감당하기에 충분했다. 필리핀 전통 옷인 바롱( Barong) 은 가슴 부분을 중심으로 화려한 수공예 자수 장식이 있는 것이 보통인데, 자수가 얼마나 복잡하게 되어 있는지가 옷을 입은 사람의 계급이나 부의 정도, 또는 행사의 중요성을 표시해주기도 했다. 입은 옷의 색깔이나 직물의 종류만 봐도 상류층과 평민 계층의 구분 을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하긴, 바롱은 옷의 모양새 자체가 혼자 입기가 어려운 형태를 하고 있어 서민층에서 평상복으로 입기 보다는 중상류층의 예복으로 사용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바롱이 중상류층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평민들(Natives)도 바롱 타갈로그를 입었다. 보통은 거친 직물로 만든 헐렁한 셔츠를 평상복으로 입었지만, 갈색이나 파란색 등 어두운색의 저렴한 직물로 만든 바롱을 입기도 했다. 1800년대 초반의 서민들의 복장 식민통치의 유산이면서 부를 상징하는 옷 바롱( Barong) 에 대한 흔한 설명 중 하나는 이 옷이 식민통치의 유산이라는 설명이다. 스페인 지배 계층이 원주민이 열등한 신분임을 깨닫게 하려고 바롱을 입게 했다는 것이다. 얇고 가벼운 소재의 옷을 만들어 바지 바깥으로 내어 입게 된 것이 필리핀의 무더운 기후 때문만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스페인 지배층은 상류층에게 모자와 신발을 착용하도록 했고, 목에 컬러가 있는 셔츠를 입는 방법을 알려주었지만, 부나 권력을 아무리 많이 가지게 된다고 해도 그들이 원주민 자리에 있음을 상기시키고자 바롱을 입도록 했다. 옷 안에 무기를 감추지 못하도록 속이 비치는 얇은 셔츠를 입게 하고, 물건을 훔치거나 숨기지 못하게 하기 위해 주머니가 없는 옷으로 만들었다는 식의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필리핀 국수주의자들은 이 이야기가 거짓된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바롱이 식민지 지배의 유산임을 입증할만한 문서화된 기록이 없으며 스페인 시절 의복의 디자인이나 착용 방법에 대해서 어떤 명문화된 규범으로 강제되기보다는 당시 패션의 유행을 따르는 경향이 강했다는 주장이다. 필리핀 전통의상 바롱(Barong) 독재자 마르코스 대통령과 바롱의 대중화 특권층이 아님을 강조하며 대선에 출마한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은 기존 엘리트층과 다름을 강조했다. 선거 운동 당시 폴로셔츠와 면바지를 즐겨 입으며 소탈한 이미지를 내세운 두테르테 대통령은 취임식에서도 명품 정장 대신 바롱 타갈로그와 검은 면바지를 입었다. 취임식에서 보여준 바롱 타갈로그가 웬만한 정장보다 비싸 보이기는 하지만, 필리핀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것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바롱 타갈로그(Barong tagalog)가 대중화된 것에는 필리핀 대통령의 힘이 컸다. 필리핀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이라는 라몬 막사이사이(Ramon F. Magsaysay) 대통령은 1953년부터 1957년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각종 행사장에서는 물론이고 사석에서도 바롱 타갈로그를 입어 바롱의 대중화를 도왔다. 무려 21년간 독재 장기집권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Ferdinand E. Marcos) 전 대통령도 통치 기간 중 바롱 셔츠를 즐겨 입었는데, 1975년도에 들어 아예 포고령(Proclamation)을 통해 바롱 타갈로그를 민족의상(the national attire)으로 지정했다. 이 포고령(Proclamation No. 1374)을 보면 매년 6월 5일부터 일주일을 바롱 타갈로그 주간(Barong Filipino Week)을 설립한다는 부분도 눈에 띈다. 1972년에 계엄령을 공포하고 난 뒤라서였을까. 학교 교복이나 기업의 유니폼으로 바롱입기를 권장하는 마르코스의 포고령은 따르는 곳이 많았다. 필리핀항공과 아얄라 등과 같은 회사들이 바롱을 유니폼으로 사용하기에 나섰다. 1998년, 필리핀 대법원에서 사법부의 모든 직원에게 바롱 타갈로그어 착용을 의무화하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에 이용되었던 필리핀항공의 승무원복. 필리핀인 디자이너 Christian Espiritu가 디자인한 이 유니폼은 활동성이 좋지 못하여 계속 디자인 개선 작업을 해야만 했다. 천의 소재를 좀더 간소화하고 옷자락을 짧게 하는 등 디자인을 바꾸었다. (출처 : Dressing Up PAL. 1991. Mabuhay Magazine) 차콜을 넣어 사용했던 필리핀의 다리미 필리핀 전통의상 바롱(Barong)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History of the Barong Tagalog · Proclamation No. 1374 · Americana vs. Camisa: The History of Filipino Men's Fashion · 1800년대 초반의 서민들의 복장 사진 출처 : Paul de la Gironiere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선언 시 사용되었던 필리핀 국기를 만든 사람, 마르셀라 아곤실로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선언 시 사용되었던 필리핀 국기를 만든 사람, 마르셀라 아곤실로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9월 21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필리핀 국기의 어머니, 마르셀라 아곤실로(Marcela Agoncillo) 필리핀의 국기를 도안한 사람은 필리핀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이다.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1898년 6월 12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선언 시 처음으로 필리핀 국기를 게양했다. 그렇다면 필리핀 최초로 국기를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마르셀라 아곤실로 · 본명: Doña Marcela Mariño de Agoncillo · 1860년 6월 24일 출생~1946년 5월 30일 사망 · 필리핀 국기의 어머니 에밀리오 아기날도 의 도안에 따라 국기를 만든 이는 마르셀라 아곤실로(Marcela Agoncillo) 이다. 필리핀 국기의 어머니(The Mother of the Philippine Flag)라고 불리는 마르셀라 아곤실로는 바탕가스 따알(Taal)이 고향이었는데, 결혼 전 수녀원에서 생활할 때 자수와 바느질을 배웠다고 한다. 마르셀라 아곤실로는 변호사이자 외교관이었던 펠리페 아곤실로(Felipe Encarnacion Agoncillo)와 결혼하고 마닐라 말라떼 근처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는데, 어려운 주변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카티푸난(KKK) 단원이었던 남편과 함께 홍콩으로 가서 긴 망명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녀는 홍콩에서 에밀리오 아기날도를 만났고, 최초의 필리핀 국기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마르셀라 아곤실로가 딸 로렌자(Lorenza Mariño Agoncillo)와 호세 리잘의 조카인 델피나(Delfina Herbosa de Natividad)와 함께 국기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마르셀라 아곤실로가 딸 로렌자의 도움으로 국기를 만들었다는 부분은 사실 좀 의문이다. 로렌자는 1890년에 태어났으니, 국기가 제작된 1898년에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암튼 마르셀라 아곤실로는 홍콩에서 아이용 옷을 만들어 팔아 망명 생활에 보탰을 정도로 양재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니, 국기를 만드는 일에 나서게 되었다. 최초의 국기는 식탁보로 써도 될만한 크기로 만들어졌는데 근처 상점에 가서 고급 실크실 등 재료를 준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태양의 여덟 갈래 빛 부분을 수놓기는 쉽지 않아서 국기를 완성하기까지 닷새가 걸렸다고 한다. 하지만 마르셀라는 그녀가 만든 깃발이 독립 선언에 사용되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은 뒤에야 홍콩에서의 망명을 마치고 마닐라로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셀라 아곤실로는 자신의 보석을 팔아 독립 자금을 대었을 정도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많은 활동을 했었지만, 필리핀의 독립을 직접 보지 못하고 1946년 5월 30일 사망하여 칼로오칸에 있는 라 로마 가톨릭묘지(La Loma Catholic Cemetery)의 남편 곁에 안장되었다. (필리핀은 1946년 7월 4일에 미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여담이지만, 호세 리잘의 부인이었던 조세핀 브렉켄(Josephine Bracken)이 스페인 총독부의 고문을 피해 홍콩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마르셀라의 집에서 머물렀었다는 이야기가 있기도 하다. 그리고 마르셀라 아곤실로가 만들었던 국기는 전쟁 중 분실되었지만, 그녀가 필리핀 최초의 국기를 만드는 데 사용한 골무만큼은 말라카냥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필리핀 UP대학교에 가면 마르셀라 아곤실로을 볼 수 있다. UP대학은 필리핀 최고의 대학이지만, 동상의 관리 상태가 매우 부실한 편이다. 필리핀 퀘존 쿠바오 소코로 바랑가이(Brgy.Socorro)에 있는 마르셀라 아곤실로의 벽화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필리핀 국가역사위원회(NHCP): The Flag of Our Filipino Fathers and Mothers · 필리핀 국가역사위원회(NHCP): A Tribute to the Philippine Flag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1863년, 공립학교 설립 - 왜 필리핀 사람들은 스페인어를 하지 못할까?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1863년, 공립학교 설립 - 왜 필리핀 사람들은 스페인어를 하지 못할까?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10월 22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마닐라 인트라무로스에 있는 이사벨라 여왕 동상(Bronze Statue of Isabel II of Spain) 필리핀 사람 대부분은 필리핀 독립선언문 이나 말로로스 헌법 을 전혀 읽을 수 없다. 필리핀어(타갈로그어)나 영어가 아닌 스페인어로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호세 리잘이 쓴 소설 《 놀리 메 탄헤레(Noli me Tangere) 》도 마찬가지이다. 스페인어로 작성되어 번역본을 보지 않고는 읽기가 쉽지 않다. 민다나오의 잠보앙가에 가면 스페인어를 기반으로 한 차바카노어(Chavacano)가 사용된다고 하지만, 필리핀 전체 인구를 생각하면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런데 왜 필리핀 사람들은 스페인어를 하지 못할까?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필리핀 타갈로그어의 단어 중 약 30%는 스페인어 단어를 빌려다 만든 차용어라고 한다. 필리핀은 300년 넘게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를 받은 나라인지라 약 4천 개의 타갈로그어 단어가 스페인어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놀랍지 않지만, 오랜 기간 스페인의 식민지였음에도 스페인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조금 독특하다. 이에 대해 '스페인에서 봤을 때 필리핀인은 스페인어를 가르칠 정도의 지적 수준을 가진 상태가 아니라 스페인어를 전혀 가르치지 않았다'는 식의 설명을 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데, 이 설명은 100% 옳은 설명이라고 보기 어렵다. 가톨릭을 전파하기 위해 필리핀에 온 성직자들이 원주민(필리핀인)이 스페인어를 배울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고 스페인어 교육에 소극적이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스페인어를 배울 기회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스페인 지배계층은 자신들을 도울 수 있는 현지인 출신의 하급 관리를 필요로 했고, 이들이 스페인어를 구사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중국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메스티조(혼혈인)의 경제활동 및 교육을 장려했다. 1863년, 공립학교 설립 1830년 뇌졸중으로 페르난도 7세가 사망한 뒤 스페인 왕의 자리를 물려받은 것은 딸인 이사벨 2세 여왕(Isabel II de Borbón)이었다. 이사벨 2세 여왕은 고작 3세의 나이에 스페인 여왕의 자리에 올랐고, 카를로스 전쟁을 거치고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는 가운데에서도 1868년 혁명으로 왕위를 뺏길 때까지 여왕 자리를 지켰다. 이사벨 2세 여왕은 여왕으로서의 자질 논란을 벗어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스페인 여왕 자리에 있으면서 이룬 업적 중 하나가 바로 1857년 공공교육법(모야노법)의 공표이다. 스페인의 높은 문맹률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이 공공교육법은 식민지였던 필리핀의 교육제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1863년 12월 20일 제정된 교육령(Educational Decree)에 따라 필리핀에 스페인어를 교육 언어로 사용하는 공립학교가 설립 되기 시작했다. 이 학교는 기본적인 읽기와 쓰기, 산수 그리고 교리 문답 등을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무료 교육 시설로 인종이나 성별, 부모의 재산 등과 관계없이 교육을 제공했다. 물론 초등교육이 무료가 되는 스페인 교육령이 생겼다고 하여 갑자기 모든 필리핀인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스페인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공립학교의 설립은 중상류층의 필리핀인 아이들이 스페인어를 배울 좋은 기회가 되었다. 야얄라 뮤지엄(Ayala Museum) 소장품 성직자들에 의한 교육 흥미로운 것은 스페인어 교육에 소극적이었던 가톨릭 성직자들이 학교의 교육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1521년에 페르디난드 마젤란 이 필리핀 호몬혼섬에 도착했을 때부터 스페인 원정대의 배에는 늘 사제들이 함께 타고 있었던 것은 익히 알려진 이야기이다. 1571년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 가 인트라무로스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필리핀 제도는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선언한 이후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1571년)의 뒤를 이 프란치스코회(1578년), 예수회(1581년), 도미니크회 수도회(1587년)의 성직자들이 차례로 필리핀에 도착했다. 교회 안에서 종교로 통합된 마을을 만들어서 식민 지배체제를 강화하고자 했던 스페인의 비호를 받으며 선교사들은 매우 의욕적으로 종교 전파에 나섰지만, 100개가 넘는 언어를 사용하는 섬나라 필리핀에 가톨릭을 전파하기란 쉽지 않았다. 지역마다 다른 언어로 인해 필리핀인들조차도 서로 소통이 어려운 상태인데, 대체 어떻게 이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전달할 수 있다는 말인가? 행정에 있어서는 스페인어가 공용어로 채택되었지만, 선교 활동에 있어서는 대체 어떤 언어를 사용할 것인가를 결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페인 성직자들은 필리핀 사람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친 뒤 복음을 전달하지 않았다. 필리핀 사람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것보다 자신들이 필리핀 사람들이 쓰는 언어를 배우는 쪽이 가톨릭 전파에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직자들은 어느 정도 가톨릭이 전파되고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의 수가 늘어난 뒤에도 필리핀인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치지 않았다. 반란의 위험성 때문이었다. 필리핀인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쳐 공용어가 생기게 되면 결국 스페인 식민 통치에 저항할 것이라 예상한 것이다. 게다가 당시 성직자들은 스페인 지배계층과 원주민인 필리핀인 사이를 연결하는 통역 겸 중개자의 역할을 하며 필리핀 사회에서 실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필리핀인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일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어 사용 인구의 증가 필리핀 사람들에게 스페인어를 교육하는 것을 반대하는 태도를 보이던 성직자들이 무상 공교육 시스템을 운영하게 되었으니, 수업은 종교교육을 위주로 진행되었다. 수도사들은 필리핀인 학생들에게 그들이 지능이 낮고 육체노동에만 능숙하다는 식으로 교육하기 일쑤였고, 교실 내 차별도 심했다. 하지만 수도사들의 이런 교육 태도와 열악한 학교 재정 상황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어 사용 인구는 꾸준히 늘어났다. 아시엔다 대농장 경영을 통해 부유한 중상류층으로 자리 잡은 메스티조는 자녀들을 스페인 등 유럽으로 유학을 보낼 수 있을 탄탄한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고, 이런 교육은 일러스트라도(Ilustrado) 라고 불리는 엘리트 지배계층이 생겨나게 했다. 스페인어로 교육을 받고 유럽의 사상을 접한 일러스트라도스 지식층은 스페인어로 독립선언서 를 썼고, 스페인어로 말로로스 헌법 을 만들었다. 신문과 문학 작품 역시 대부분 스페인어로 작성되었다. 하지만 스페인어는 엘리트 지배계층의 언어로 사용되었을 뿐 민중의 언어가 되지는 못했다. 엘리트 계층 상당수는 스페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엘리트 계층의 언어로 한정되어 있었을 뿐 모든 이들이 스페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지는 못했다고 보면 된다. 스페인어 사용 인구의 감소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1571년~1898년)가 끝나고, 미국 식민지 시대(1898년~1946년) 가 시작되면서 영어가 스페인어를 밀어내기 시작한다. 필리핀에 미국식 문화가 확산되기를 원한 미국은 스페인과 다른 방법으로 필리핀을 식민지 지배했다. '미국인의 가치관을 가진 필리핀 사람'을 만들 수 있도록 미국 정부에서는 영어를 교육하는 학교 시스템을 필리핀에 도입했다. 미국에서는 영어를 공용어로 만들고자 했고, 영어 교육을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 필리핀 곳곳에 학교를 세웠다. 미국 육군 수송선 토마스호까지 이용하여 필리핀으로 교사들을 데리고 와서 영어 교육을 진행했다. 좀 아이러니한 것은 미국 식민지 지배 초창기 필리핀 독립운동가들이 스페인어를 이용하여 미국의 식민지 지배에 거부하는 글을 썼다는 점이다. 지식인층 대부분이 스페인어로 교육을 받았던 터라 공통어인 스페인어를 이용하여 미국의 식민지에 반대하는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적극적인 영어교육이 시작되면서 스페인어 사용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공립학교에서 스페인어 사용이 금지되고, 1935년 헌법(The 1935 Constitution)는 코먼웰스 정부가 영어로 운영되는 적절한 공립학교 시스템을 구축하고 유지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필리핀 자치령 코먼웰스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마누엘 퀘손 대통령은 영어로 대국민 연설을 했고, 많은 것들에 영어로 된 이름이 붙여졌다. 사회적으로 출세하기 위해서는 영어의 습득이 필수 요건이 되며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욕구도 높아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식민지 기간 중 스페인어 사용인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특히 마닐라의 상류층 가정에서는 여전히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1927년에 텔레비전이 등장한 뒤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1929년에 TV의 발명에 대한 연설을 하면서 이 연설을 영상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 영상을 보면 아기날도가 스페인어로 연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935년 필리핀 헌법은 영어와 스페인어로 공포되었는데, 헌법 제13조를 보면 "법률에 의해 달리 규정되지 않는 한 영어와 스페인어는 공식 언어로 계속 사용된다"라고 적어둔 것을 볼 수 있다. 필리핀에서 스페인어 사용 인구가 눈에 띄게 급격히 줄어든 것은 실상 전쟁 때문이었다고 평가된다. 1945년 마닐라 전투 에서 인트라무로스 지역이 폭격을 당하며 스페인어 사용 인구의 상당수가 사망한 것이다. 한편, 1987년 헌법에 따라 현재 필리핀의 공용어 는 필리핀어와 영어이다. 스페인어에 대해서는 자발적이고 선택적으로 사용할 것을 권고하고 있을 뿐이다. 필리핀 이사벨라주의 일라간에 있는 이사벨라 여왕 공원(Queen Isabela Park)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1935년 필리핀 헌법: The 1935 Constitution · President MANUEL LUIS QUEZON: Message to the People of the Philippines | Circa 1920s · Emilio Aguinaldo Speech in Spanish (1929) · Esquire: Why the Philippines Is the Only Former Spanish Colony That Doesn't Speak Spanish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1872년, 곰부르자(GOMBURZA) 신부의 공개 처형과 필리핀 민족주의 운동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1872년, 곰부르자(GOMBURZA) 신부의 공개 처형과 필리핀 민족주의 운동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10월 24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필리핀 비간에 있는 호세 부르고스(Jose Burgos)의 동상. 호세 부르고스는 필리핀 성직자의 평등을 위해 싸우다가 1872년 반역 혐의로 처형됐다. 필리핀 식민지 시대 가톨릭 신부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났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 그 이상이었다. 스페인에서 파견된 관료들의 수는 턱없이 부족했고, 원주민(필리핀인)은 스페인어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수도사들은 가톨릭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원주민의 언어를 배웠으니, 스페인 지배계층과 원주민인 필리핀인 사이를 연결하는 중개자의 역할은 가톨릭 신부에게 맡겨졌다. 가톨릭교회에서 스페인 정부로부터 거대한 규모의 토지를 받아 소작농에게 임대하면서 경제적인 영향력도 커졌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 말기가 되면서 가톨릭 사제는 필리핀 사회에서 가장 부유하고 정치적으로 강력한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런데 메스티조(메스티소) 혼혈인과 필리핀인이 신학을 공부하여 신부가 되기 시작하면서 교회 내부에서 차별의 문제가 생겨났다. 18세기 이후 스페인에서는 가톨릭 성직자들의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해 메스티조와 필리핀인도 사제가 될 수 있도록 장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기존의 성직자들이 반겼을 리가 없다. 필리핀계 성직자에게 교회에서의 권력을 뺏기고 싶지 않았던 가톨릭교회는 메스티조와 필리핀인은 주임 신부로 임명되지 못하게 하는 등의 방법으로 이들을 차별했다. 메스티조가 성직자가 되는 것을 아예 금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가톨릭 수사에 대한 인종차별이 심해지자 마리아노 고메즈, 호세 부르고스, 하신토 자모라 신부는 교회 안에서 차별을 철폐하는 교회 개혁 운동을 벌였다. 세 신부 모두 필리핀인, 중국인, 스페인인 등의 혈통을 가진 메스티조(혼혈인)로 성당 내에서 상당히 높은 품계까지 오른 상태였지만, 필리핀인 성직자(native clergy)의 권리를 옹호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들 신부의 교회 개혁 운동은 성공하지 못했다. 카비테 반란을 주도했다는 혐의를 받고 처형당한 것이다. 리잘파크에 있는 GOMBURZA Monument. 곰부르자의 처형 장소를 표시하는 기념물이다. 곰부르자 신부 처형 GOMBURZA 1872년 2월 17일 1872년 1월 20일 마닐라의 근교에 있는 카비테의 포트 산 펠리페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이 부당한 처우에 반발하여 일어난 단순한 반란이었는지 아니면 스페인 식민지 정부를 전복하려는 의도가 있는 반란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마다 의견을 달리하지만, 포트 산 펠리페에서 일하던 필리핀인 노동자들이 세금과 강제 노동을 면제받을 수 없게 된 것을 알게 되며 분노하여 봉기한 것만은 확실하다. 약 200명의 메스티조(혼혈인) 군인과 노동자들이 모여 스페인 장교를 죽이고 순식간에 요새를 장악했지만, 지원군이 없는 상태였던 터라 스페인군이 요새를 포위하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카비테 반란(1872 Cavite mutiny)은 빠르게 진압되었지만, 스페인 수도사들은 이 사건을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던 호세 부르고스 신부 및 메스티조 신부들을 제거할 기회로 삼았다. 1872년 2월 17일, 마리아노 고메즈, 호세 부르고스, 하신토 자모라 신부는 카비테 반란을 주도했다는 혐의를 받고 처형된다. 이들이 카비테 반란을 주도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었지만, 급하게 진행된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교살형(Garrote)을 당했다. 세 명의 신부가 바굼바얀(현재의 리잘파크)에서 목졸라 처형되었다는 소식은 곧 빠르게 퍼져나갔고, 필리핀 사람들은 마리아노 고메즈(Mariano GOM ez), 호세 부르고스(José BUR gos), 하신토 자모라(Jacinto ZA mora) 세 신부의 이름을 앞 글자를 따 곰부르자(GOMBURZA)라고 불렀다. 곰부르자 신부의 묘지는 파코묘지(현재의 파코공원) 에 있다. 그런데 곰부르자 신부는 정말 카비테 반란을 주도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제대로 된 조사 과정 없이 스페인 신부들의 증언만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곰부르자의 순교 사건은 필리핀 민족의식을 자극하게 되었다. 스페인에서는 필리핀 민족주의 운동을 탄압하고자 곰부르자 신부를 처형했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곰부르자 신부의 처형은 필리핀인들이 스페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편, 1891년 호세 리잘 은 《놀리 메 탄헤레(Noli me Tangere)》의 속편에 해당하는 소설 《엘 필리부스테리스모(El filibusterismo)》 을 출판했다. 가톨릭교회의 부패를 풍자화하고 종교적 위선을 폭로하는 내용을 담은 소설이었다. 호세 리잘은 소설 서문에 억울하게 처형된 곰부르자(GOMBURZA) 신부에게 책을 바친다고 적었고, 이 책을 통해 필리핀 사람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그리고 필리핀 내에서 민족주의 운동을 촉진하는 데 기여한다. 호세 리잘의 놀리 메 탄헤레(Noli me Tangere). 식민지의 억압적인 현실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호세 리잘의 책은 스페인으로부터 금서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National Historical Commission of the Philippines (NHCP): The Two Faces of the 1872 Cavite Mutiny · National Museum of the Philippines : NATIONAL MUSEUM ILOCOS EXHIBITIONS · Harvard Divinity School: Catholicism in the Philippines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유적지: 스페인로부터의 독립 선언을 했던 장소, 카비테의 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유적지: 스페인로부터의 독립 선언을 했던 장소, 카비테의 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7월 1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생가 필리핀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삼십 대 중반에 처형된 호세 리잘이나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와 다르게 94세까지 장수하였다. 그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였던 1869년에 태어나 미국 식민지 시대를 살아간 뒤 필리핀 독립 후인 1964년에 사망했는데, 죽기 전에 카비테 카윗에 있는 자신의 집을 필리핀 정부에 기증했다. 그의 집은 필리핀 역사에서 매우 중요했던 사건이 있었던 장소인 터라 필리핀 정부에서는 아기날도의 집을 아기날도 쉬라인 앤 뮤지엄(Aguinaldo Shrine and Museum) 이란 이름으로 박물관으로 꾸며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생가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의 아버지인 카를로스 아기날도(Carlos Jamir Aguinaldo)가 카비떼의 카윗에 처음 집을 지은 것은 1845년이었다고 한다. 원래는 니파헛 형태의 나무집이었지만, 가족이 늘어남에 따라 1949년에 집을 다시 지었다고 전해진다. 새로 지은 집은 석회석과 나무를 주로 사용했는데, 당시 부유층이 흔히 그러하였듯 카피즈 조개껍질을 이용하여 넓은 창문을 만들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이 집에서 태어났고, 1898년 6월 12일에 이 집 거실에서 스페인으로부터의 필리핀의 독립선언을 하였으며, 필리핀 제1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로는 이 집에서 대통령 업무를 보기도 했다. 죽은 뒤에는 건물 뒤 정원에 그의 무덤이 마련되기도 했다. 비밀통로가 있는 가정집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필리핀-미국 전쟁 중 미군에게 체포된 후 정계에서 은퇴하여 카비테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그리고 1919년에서 1921년까지 3년 동안 대대적인 집수리를 했다. 은둔생활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구하기 어렵다는 고급 목재를 사용해서 집을 수리했는데, 건물이 상당히 견고하게 수리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집을 자세히 살펴보면 미국 식민지 시절 주택의 특징과 함께 필리핀 상류층 가정의 주거 형태를 엿볼 수 있다. 1,324㎡(약 400평) 규모의 건물은 본관을 중심으로 중앙 탑과 동쪽의 가족 주거지 세 구역으로 나뉘는데 아기날도가 대통령직을 수행할 때 본관 메인 홀에서 국가 중대사가 결정되곤 했다고 전해진다. 가족 주거지였던 구역으로 가면 침실과 주방, 식당, 거실 등의 공간을 만날 수 있는데, 아기날도와 그의 가족들이 사용하던 침대며 옷장, 흔들의자 등의 가구와 목제 공예품을 직접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집은 내부 설계가 상당히 흥미롭다. 저택 안 구석구석에 비밀 장소가 대단히 많아서 언제든 피신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아기날도의 침실로 가는 메인 통로 쪽을 보면 선반 벽으로 위장된 비밀통로 시설이 되어 있는 식이다. 주방 식탁 아래도 비밀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폭격 시 사용할 수 있도록 대피소로 꾸며져 있다. 박물관 직원이 안내에 따르면 의자나 캐비닛 등 가구에도 비밀 보관함 장치가 곳곳에 되어 있는데 중요 문서나 무기 등을 숨기는 용도로 사용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했겠지만, 집 안 구석구석에 있는 비밀 장치를 보면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삶도 마냥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인디펜던스 발코니(Independence Balcony) 인디펜던스 발코니 6월 12일에 필리핀에 있다면 마닐라 근교에 있는 카비테의 카윗(Kawit)에 가면 좀 색다른 행사를 볼 수 있다. 바로 필리핀 독립기념일(Independence Day) 기념행사다. 해마다 행사 규모는 다르지만 독립기념일을 기념하기 위해 이런저런 행사 프로그램이 진행되는데 필리핀 특유의 전통적인 퍼레이드와 함께 진행되어 꽤 볼거리를 선사한다. 하지만 그중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오전에 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에서 진행되는 국기게양식 행사이다. 이 국기게양식은 필리핀 대통령을 비롯하여 정부 주요 인사들이 모두 모여서 거행되는 중요한 행사이다. 필리핀 정부에서 독립기념일에 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의 인디펜던스 발코니(Independence Balcony)에서 국기게양식 행사를 진행하는 것은 이 발코니에 상당한 역사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 따르면, 1898년 6월 12일에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카티푸난의 독립운동가들이 바로 이곳 카비테의 집에서 모여 암브로시오 바우티스타 가 작성한 필리핀 독립선언문 을 낭독하고 필리핀 국기를 게양했다고 한다. 훌리안 펠리페(Julian Felipe)가 작곡한 필리핀 국가 행진곡(Marcha Nacional Filipina) 이 처음으로 사용된 것도 이 날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1898년 당시에는 집에 돌출개방형 발코니가 없었고 거실 창문에서 독립을 외쳤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의미가 퇴색되지는 않는다. 참고로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1920년대에 대대적인 건물 수리를 하였는데, 그때 발코니를 만들었다고 한다. 독립 선언의 장소를 명확히 각인시키고자 하는 목적이었다는데, 그래서인지 필리핀 독립선언에 대한 이미지를 보면 대부분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독립선언문을 발표하면서 발코니 바깥에서 국기를 흔드는 이미지이다. 필리핀 지폐 속 그 집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독립운동가들이 카비테의 집에서 모여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필리핀 국기를 흔드는 모습은 구권 2페소 지폐와 5페소 지폐 도안에 들어가기도 했었다. 그림 속 필리핀 국기의 크기가 매우 큰 것을 볼 수 있는데 과장되어 그려진 것이 아니다. 독립 선언 시 사용되었던 필리핀 최초의 국기는 실제 식탁보로 사용해도 될 정도로 크게 만들어졌다. 아기날도의 부탁을 받고 홍콩에서 마르셀라 아곤실로 가 바느질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𖠿 관련 글 보기 필리핀 역사: 1898년 6월 12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선언(필리핀 독립기념일) 카비테 카윗의 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Aguinaldo Shrine and Museum) 카비테의 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 Aguinaldo Shrine and Museum(Aguinaldo House) 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Aguinaldo Shrine and Museum)은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태어나고 생활하였던 생가를 박물관으로 개조한 곳이다. 미국에 항복하여 충성 선서를 하고,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의 반미 심리전에 이용당했던 에밀리오 아기날도를 진정한 국가 영웅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지만, 그런 이들에게 있어서도 필리핀 독립 선언이 있었던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생가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원래 이 집은 에밀리오 아기날도 개인 소유였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필리핀 정부에서 정식으로 관리하고 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죽기 전, 1963년 3월 22일에 93세의 생일을 맞아 정식으로 필리핀 정부에 기증한 것이다. 필리핀 정부는 아기날도 사망 후 1964년 6월에 공화국법 4039호(Republic Act 4039)에 따라 아기날도의 저택을 국가 유적지로 선언했고, 국립박물관청(National Museum agency)에서 관리하도록 했다. 그러다가 1972년 필리핀 국가역사위원회(NHCP)로 시설 운영권이 공식적으로 양도되었다. 필리핀 국가역사위원회(NHCP)에서는 1층을 박물관으로 개조하고 시청각실 등의 시설을 만들어 대중에게 개방하고 있는데, 필리핀에 있는 그 어떤 역사유적지보다도 방문객이 많은 유적지로 손꼽힌다. 건물 뒤쪽으로 정원에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무덤도 있다. ■ 주소: Barangay Kaingen, Kawit, Cavite ■ 위치: 필리핀 카비테 카윗 / 마닐라공항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 ■ 운영시간: 오전 9시 ~ 오후 4시(월요일 휴관) ■ 입장료: 무료 필리핀 카비테 카윗 카비테 카윗의 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Aguinaldo Shrine and Museum) 박물관 입구 카비테 카윗의 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Aguinaldo Shrine and Museum) 카비테 카윗의 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Aguinaldo Shrine and Museum) 커다란 정원을 가진 저택이다. 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 전시실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혁명 정부에 관련된 다양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 전시실 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 전시실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실제 사용했던 가구를 볼 수 있다. 침실 비밀통로가 있는 복도 서류 등을 숨길 수 있도록 가구에 비밀 보관함 장치가 되어 있다고 한다. 저택 뒤에는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무덤이 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무덤 집 앞 공원(Freedom Park)에 있는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청동상 Freedom Park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NHCP Museo ni Emilio Aguinaldo · The Filipino Spirit: The Aguinaldo Shrine · Real Living: 6 Things You Need To Know About The Aguinaldo Shrine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유적지: 보니파시오에 있는 마닐라 미군 묘지 추모 공원(Manila American Cemetery)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유적지: 보니파시오에 있는 마닐라 미군 묘지 추모 공원(Manila American Cemetery)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3월 3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마닐라 미군묘지 추모 공원 (Manila American Cemetery and Memorial) 1946년 7월 4일 필리핀은 미국으로부터 독립했다. 독립 직후 미국에서는 필리핀 국토를 필리핀 정부에 반환했는데, 군사기지가 있는 지역은 제외되었다. 1949년 5월 14일이 되어서야 타귁의 윌리엄 맥킨리 요새(Fort William McKinley)는 필리핀 정부 소유로 반환되었다. 요새를 반환하기 전인 1948년, 미국에서는 맥킨리 요새에 묘역을 조성하고 2자 대전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묘지를 만들었다. 이 묘지가 바로 타귁시티에 있는 마닐라 미군묘지 추모 공원(Manila American Cemetery and Memorial) 이다. 이 추모 공원은 152에어커(약 18만 6천 평)에 이르는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으며, 필리핀 정부가 아닌 미국의 전쟁기념물위원회(ABMC)에서 묘지의 운영 및 관리 를 담당하고 있다. 그래서 묘지 안을 자세히 보면 미국 성조기가 눈에 띄는데, 성조기 하강식도 매일 진행된다.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다른 시설과 다르게 미군묘지 추모 공원은 누구에게나 방문이 개방되어 있는데, 너무 넓어서 모두 돌아보기는 어렵고 보통 중앙에 있는 Wall Of Missing이라는 이름의 원형의 무명용사 기념물과 채플,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안내문 등을 중심으로 관람하게 된다. 묘역은 중앙의 기념물을 중심으로 나선형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초록색 공원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17,000여 개의 흰색 대리석 십자가의 주인은 대부분 미국인이다. 전쟁기념물위원회(ABMC)에 따르면 16,859명에 이르는 미군 전사자가 이곳에서 쉬고 있다고 한다. 흰색 십자가가 워낙 인상적이기 때문인지 가끔 마닐라 여행 중 방문해 볼 만한 곳으로 미군묘지가 언급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일부러 시간을 내서 방문할 정도의 시설은 아니다. 물론 이곳 미군묘지가 필리핀 내 그 어떤 묘지보다 상당히 쾌적하게 잘 관리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필리핀 역사에 대해 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크게 볼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보니파시오 지역에 있다면 잠깐 들러볼 만하지만, 말라떼나 파사이 쪽에서 미군 묘지 하나를 보러 일부러 시간을 낼 정도는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무엇보다 이곳 미군묘지를 놓고 '필리핀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숭고한 영혼'이라는 식의 설명을 붙이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곳에 안장된 군인 대부분은 미국인이며 이들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을 때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였다. 마닐라 미군묘지 추모 공원 (Manila American Cemetery and Memorial) 마닐라 미군묘지 추모 공원 Manila American Cemetery and Memorial ■ 주소: Manila American Cemetery. McKinley Road, Fort Bonifacio 1634 Philippines ■ 위치: 필리핀 마닐라 타귁시티 ■ 입장료: 무료 ■ 관람시간: 오전 9시~오후 5시 마닐라 미군묘지(Manila American Cemetery and Memorial)는 1월 1일과 12월 25일(크리스마스)에만 이틀만 문을 닫는다. 입구에서 사진이 부착된 신분증을 제시해야만 입장이 가능하다. 오른쪽에 보이는 녹색 공원이 마닐라 미군묘지이다. 사진 중앙의 왼쪽 부분에 있는 건물이 바로 필리핀 대사관 건물이다. Manila American Cemetery and Memorial 마닐라 미군묘지 입구 초록색 잔디 위에 빽빽하게 늘어선 십자가만 없다면 공원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조경이 잘 되어 있다. Manila American Cemetery and Memorial Manila American Cemetery and Memorial Manila American Cemetery and Memorial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ABMC(American Battle Monuments Commission): Manila American Cemetery · U.S. EMBASSY IN THE PHILIPPINES: MANILA AMERICAN CEMETERY AND MEMORIAL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유적지: 마닐라 보니파시오, 32번가에 세워진 예술 작품 Ang Supremo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유적지: 마닐라 보니파시오, 32번가에 세워진 예술 작품 Ang Supremo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9월 20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Ang Supremo: Andres Bonifacio Monument in BGC 보니파시오에서 세인트룩스 메디컬센터 근처 32번가에 가면 높이가 3m 정도 되는 예술 작품을 하나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지난 2020년 작고한 예술가 빌라누에바(Ben-Hur G. Villanueva)가 필리핀의 국가 영웅인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독립을 위해 투쟁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작품으로 앙 수프레모(Ang Supremo)라는 작품명을 가지고 있다. 수프레모(Supremo)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 활약했던 필리핀의 무장 독립운동단체인 카티푸난(KKK)의 지도자를 의미한다. 필리핀 마닐라 타귁시티에 있는 보니파시오 글로벌 시티(Bonifacio Global City, BGC) 의 이름이 필리핀의 국가 영웅인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음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BGC에서는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를 기리기 위해 지난 1998년 7월에 보니파시오에 이 작품을 설치했다. 그런데 작품을 보면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외에도 2명이 함께 조각된 것을 볼 수 있다. 일단 길쭉한 대나무 창을 든 남자는 카티푸난(KKK)의 동료 를 나타낸다. 그리고 깃발을 든 여성은 보니파시오의 아내였던 그레고리아 데 헤수스(Gregoria de Jesús) 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 그레고리아 데 헤수스가 표현된 것은 그녀가 단순히 보니파시오의 아내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 역시 카티푸난(KKK) 일원으로 여성 단원들의 지도자로 활동했었다. 그레고리아 데 헤수스는 카티푸난의 문서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기도 했는데, 필리핀 총독부의 압수 수색을 피하고자 밤새 칼레사 말마차를 타고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런데 작품을 좀 더 자세히 보면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무기가 아닌 구겨진 종이를 들고 있음이 눈에 띈다. 호세 리잘과 같은 온건한 방법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닫고 카티푸난(KKK)을 조직하여 무장혁명을 통해 필리핀의 독립을 이루고자 한 사람이 바로 보니파시오이다. 그런 그가 방망이도 아닌 종이를 들고 있음이 의아하지만, 그가 들고 있는 종이는 다름 아닌 세둘라(cedula)이다. 세둘라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 매년 거주세를 납부하면 발급받던 종이로 식민지 주민임을 나타내는 역할을 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이 표현한 것은 1986년 푸가드 라윈의 통곡(Cry of Pugad Lawin) 무장혁명을 시작할 때 보니파시오의 모습인 셈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푸가드 라윈의 통곡 혁명 당시 카티푸난에서는 세둘라(cedula)를 찢어버림으로써 스페인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겠음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한편, 빌라누에바는 생전에 자신의 작품에 대해 보니파시오가 국가 영웅이 된 것은 무장혁명을 시도했기 때문이 아니라서 손에 세둘라를 쥐고 있는 모습으로 작품을 만들다고 설명했다. 보니파시오가 필리핀 독립운동의 지도자(수프레모)가 된 것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적인 면모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이다. Ang Supremo: Andres Bonifacio Monument in BGC 앙 수프레모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기념물 Ang Supremo: Andres Bonifacio Monument in BGC ■ 주소: Along 32nd St cor, Rizal Dr, Taguig, Metro Manila ■ 위치: 필리핀 마닐라 보니파시오 필리핀 마닐라 보니파시오, 세인트룩스 메디컬센터 근처에 작품이 세워져 있다. 깃발을 든 여성은 보니파시오의 아내였던 그레고리아 데 헤수스(Gregoria de Jesús)이다. 구겨진 세둘라 종이를 들고 있는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Ang Supremo: Andres Bonifacio Monument in BGC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philstar : Identifying with the Supremo · Fort Bonifacio Development Corporation: Ang Supremo By Ben-Hur G. Villanueva · Andrés Bonifacio, Katipunan Supremo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 필리핀 역사: 1950년, 필리핀 한국 원정군(PEFTOK) 한국전쟁에 참전

    필리핀 역사 | 필인러브 HOME > 필리핀 정보 > 필리핀 역사 필리핀 역사: 1950년, 필리핀 한국 원정군(PEFTOK) 한국전쟁에 참전 ⚝ 저작권 안내: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필인러브에 있으며 콘텐츠의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를 금지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 콘텐츠 등록일 : 2024년 10월 9일 ⚑ 아래의 내용은 필인러브 운영자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바탕으로 한 부분도 있습니다. 마닐라 타귁에 있는 국립 영웅묘지(마닐라 국립묘지)의 국전 참전비 2024년은 한국·필리핀 수교 75주년을 맞은 뜻깊은 해다. 지금이야 193개국과 수교를 맺은 상태이지만, 1949년만 해도 대한민국에서 수교를 맺은 국가는 대만, 미국, 영국, 프랑스, 필리핀 5개국에 불과했다. 1949년 3월 3일 대한민국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한 필리핀은 이듬해인 1950년에 한국전쟁(6·25전쟁)이 발발하자 군인 7,420명을 파병했다. 필리핀 한국 원정군 펩톡(PEFTOK) P hilippine E xpeditionary F orces to K orea 필리핀은 아세안 국가 중에서는 처음으로,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은 국가이다. 한국과 필리핀의 인연을 이야기할 때 늘 거론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한국전쟁 때 필리핀에서 선뜻 군인을 보내 도와주었다는 식의 이야기인데, 실제 필리핀은 미국 영국 다음으로, 아시아 국가 중에선 가장 먼저 6·25전쟁 파병을 결정 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 국가연합(ASEAN) 중에서 가장 많은 인원인 7,420명의 전투병을 보냈다. 모두 5개 전투대대 7,420명이 1950년부터 5년간 필리핀 한국 원정군(PEFTOK)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싸웠으며, 112명이 전사하고 299명이 부상당했으며 16명이 실종되고 41명이 포로가 되는 인명피해를 입었다. 필리핀 한국 원정군(PEFTOK, Philippine Expeditionary Force to Korea) 이야기를 하면 그게 언제 적 이야기인데 지금 하느냐고 하는 이도 있겠지만, 7천 명이 넘는 군인을 선뜻 한국으로 보내기에는 필리핀 국내 상황 역시 좋지 못했음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1946년 7월 4일에 이르러서야 긴 식민지 시대를 끝내고 미국으로부터 독립한 필리핀은 1950년 당시 공산주의 게릴라 조직인 후크발라합(Hukbalahap) 때문에 정치적으로 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독립 4년에 지나지 않아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던 시기였다. 하지만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은 유엔의 한국전 참전 결정이 내려지자 후크발라합 토벌 작전에 투입된 10개 대대 가운데 정예부대인 1개 대대를 차출하여 한국으로 파병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다고 하여 군대를 파병할 처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외 파병을 결정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1950년 9월 19일 지상군 1개 대대 전투단으로 구성된 필리핀군 전투대대 1,367명은 미 수송선편으로 필리핀을 떠났고, 미국·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부산항에 도착했다고 한다. 부산항에 도착한 이들은 열흘 간의 현지 적응훈련을 마친 후 10월 1일부터 미25사단에 배속되어 바로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전곡 진상리전투, 연천 율동전투, 적성 설마리 전투, 철원 에리고지전투(이리고지 전투), 양구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 등 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필리핀 한국 원정군(PEFTOK)은 1953년 7월 27일 한국 전쟁이 끝난 뒤에도 유엔군 사령부 경계 지원 임무와 한국의 재건을 위한 작전을 실시하다가 1955년 5월 13일에 철수했다. 한편, 마닐라공항의 이름을 니노이 아키노 공항이란 이름으로 바꾸게 한 필리핀 민주화 운동의 주역, 베니그노 아키노 2세(니노이 아키노) 는 한국전쟁 당시 불과 17살의 나이었지만 《마닐라 타임스》의 종군기자로 한국에 와서 전쟁의 모습을 필리핀에 알렸다. 필리핀 구권 500페소 지폐를 보면 니노이 아키노 전 상원의원이 마닐라 타임스 종군기자로 활약한 모습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피델 라모스 전 대통령도 6·25전쟁에 참전했다는 것으로 유명한데, 제20대대 전투단 소속으로 참전했다고 한다. 피델 라모스는 보병 정찰 소대를 이끄는 소대장(소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뒤 필리핀으로 돌아가 필리핀군 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거쳐 필리핀 제12대 대통령이 되었다. 𖠿 관련 글 보기 필리핀 역사 유적지: 필리핀 영웅묘지(마닐라 국립묘지)의 한국전 참전비 필리핀 역사 유적지: 타귁시티의 필리핀 한국 원정군(PEFTOK) 한국전 참전기념관 한-필 우정센터의 필리핀 한국전 참전기념관(PEFTOK Korean War Memorial Hall) 필리핀 한국원정군 전사자 추모비(PEFTOK Memorial Wall) ⚑ 위의 콘텐츠는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대한민국 외교부: 외교관계수립현황 · 대한민국상이군경회: 필리핀군 6.25전쟁 참전사 책자 발간 Facebook X (Twitter) 링크 복사 필인러브의 콘텐츠는 사이트 운영자 개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글 작성 시점에서만 유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작성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이전 글 다음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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