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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역사: 1942년, 바탄 반도를 피로 물들인 바탄 전투(Battle of Bataan)
⚐ 최종 업데이트:
2024년 9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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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루손섬 중부 지방을 보면 바탄(Province of Bataan)이란 동네가 있다. 서쪽으로는 남중국해를, 동쪽으로는 마닐라만을 둘러싸고 있는 이 동네는 그 지리적 위치 때문에 스페인 식민지 시대부터 중요하게 여겨졌다. 1942년 일본이 필리핀을 침공했을 때도 바탄은 대격전의 장소가 되었다. 마닐라 함락 후 미군 사령부가 바탄으로 이동하면서 일어난 바탄 전투(Battle of Bataan)로 인해 바탄은 2차 대전 중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이 되어야 했다. 일본군에 의한 포로학대의 사례로 유명한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 역시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바탄 전투
Battle of Bataan
1942년 1월 7일~1942년 4월 9일
미국 식민지 시대, 미국에서는 1901년에 설립된 필리핀 스카우트(Philippine Scouts)에 입대하면 미국 육군의 일부로 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미국의 혜택을 받고자 한 사람들은 기꺼이 필리핀 스카우트에 입대했고, 미국식 훈련을 통해 고도로 훈련된 군사 부대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바탕으로 1941년 7월 26일 미국 육군극동사령부(USAFFE,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the Far Easts)가 창설되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태평양 지역의 미국 식민지이자 주요 거점이기도 한 필리핀을 침공했다. 이때 마닐라만에서 일본의 공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나선 이들이 바로 미국 육군극동사령부(USAFFE)이다.
하지만 전투는 쉽지 않았다. 약 10만 명의 필리핀인과 2만 명의 미군으로 구성된 필리핀과의 연합군의 병사 대부분은 실제 전투 경험이 없었고, 기본 장비조차 부족했다. 게다가 미군의 추가 병력과 보급품이 도착하기도 전에 일본군의 침공이 먼저 개시되었다. 일본군이 물자를 아끼지 않고 공세를 퍼부으며 마닐라가 순식간에 함락되고 말았다. USAFFE 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미국에서 지원군이 파견될 때까지 버티기 위해 루손섬 방어에 주력했지만, 루손섬 방어선이 돌파당하자 군대를 바탄 반도로 이동시켜야 했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 본토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고 이미 식사 배급조차 절반으로 줄어든 군인들이 일본의 전면 공격을 당하기란 힘들었다. 1942년 4월 9일, 미국이 일본에 항복함으로써 바탄 전투가 끝났다. 그리고 전투가 끝난 뒤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었을 때, 이미 병사들 대부분이 굶주림에 시달린 채 전쟁에 지쳐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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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역사 유적지: 바탄 죽음의 행진과 사맛산 십자가
· The National WWII Museum: Battle of Bataan
· The National WWII Museum: Bataan Death March Survivor Lester Tenney Dies at Age 96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Bataan Death M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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