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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산페드로 요새에 있는 레가스피 총독의 동상을 보면 그가 상당히 나이가 많아 보임을 알 수 있다. 실제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가 세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환갑을 지난 나이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마닐라에서 사망했다.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

Miguel López de Legazpi(1502년~1572년)

조선의 연산군이 아직 20대 청년이던 1502년의 일이다. 에스파냐(영어식 국명은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에 살던 돈 후안 마르티네스 데 레가스피의 집안에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Miguel Lopez de Legazpi)란 이름의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부유한 귀족 집안의 귀한 막내아들이었지만, 당시는 아버지의 작위와 재산이 모두 맏형에게 상속되던 시기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레가스피는 고향을 떠나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누에바 에스파냐(New Spain)로 거주지를 옮겼고, 법학 교육을 받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노년의 시기를 탐험으로 보냈다. 개인적으로 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놀라운 것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미지의 먼 바다로 항해에 나섰다는 점이다. 이 사실이 놀랍지 않다면 당시 항해에 사용되었던 배의 모양을 생각해 보자.

에스파냐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불리던 황금시대, 레가스피는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의 지원을 받아 병사들을 이끌고 출항했다. 그리고 마젤란이 개척한 항로를 따라 태평양을 건너 1565년에 필리핀에 도착했다. 레가스피는 세부와 레이테섬 등을 돌아다닌 뒤 3월 보홀 해안에 상륙, 본격적으로 필리핀 정복에 나선다. 지금도 보홀에서는 당시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탁빌라란 시티에 있는 혈맹기념비(Blood Compact Monument)가 바로 그것이다. 1565년 레가스피와 보홀의 추장 시카투나(Datu Sikatuna)가 맺었던 우호 조약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이 기념비는 "유럽과 아시아 최초의 우호조약 서약지"라는 듣기 좋은 설명을 붙여 안내되지만 이 설명은 순전히 정복자의 입장에서 쓴 것에 불과하다. 포도주가 담긴 잔을 들고, 그 잔에 각자의 손목을 베어 핏방울을 떨어뜨려 마시며 강제로 조약을 맺어야만 했던 보홀 추장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그런 식의 안내문은 쓰지 못할 것이다.

각설하고, 이 조약을 맺은 뒤 레가스피는 다시 세부로 이동했고, 약 2년간의 전쟁 끝에 세부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세부에는 레가스피가 그토록 원하던 고가의 향신료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 마닐라에는 중국 상인들이 방문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는 중국의 상인들이 마닐라로 향료를 사러 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마닐라를 정복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미 칠순에 가까운 나이었다. 직접 전쟁을 지휘하기는 어려웠던 그는 마닐라로 그의 심복과 병사들을 보내 마닐라를 정복하도록 했고, 그의 병사들은 임무를 무사히 완수했다.

1571년 인트라무로스

1571년, 레가스피는 마닐라로 올라와 인트라무로스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필리핀 제도는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은 레가스피가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 마닐라의 관광 명소 중 하나인 인트라무로스(Intramuros)이다. 레가스피는 총독부가 있는 성벽도시, 인트라무로스('벽 안에서'라는 의미)를 마닐라 자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치와 종교, 군사의 중심지였던 성벽 도시 안에서의 그의 삶은 길지 못했다. 그는 고작 1년 정도 필리핀을 통치한 뒤 1572년 8월 20일 갑자기 사망하였는데, 사망 원인은 뇌졸중 혹은 심장병으로 추측된다. 필리핀의 초대 총독이었던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의 유해는 인트라무로스에 있는 산 아구스틴 성당(San Agustin Church)에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