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역사: 일루스트라도스 엘리트 계층과 필리핀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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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텐츠 등록일:
2019년 10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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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식민지 시대 후기에 생겨났던 일루스트라도스(Ilustrados) 엘리트 지배계층이 어떤 모습인지 보고 싶다면 필리핀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호세 리잘의 사진이나 초상화를 꺼내 보면 된다. 몸에 딱 맞게 만들어진 양복에 잘 닦여진 구두, 적당히 잘 손질된 머리까지, 옷차림에서부터 '부유한 지식인'의 느낌이 난다.
일루스트라도
Ilustrado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엘리트 지식인 계층
🜹 일루스트라도(Ilustrado)는 스페인어로 '깨달은, 학식이 풍부한, 교육받은, 계몽주의의 일원'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일루스트라도스(Ilustrado)는 일루스트라도의 복수형이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스페인 제국은 유럽과 아메리카,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까지 전 세계에 식민지를 세웠다. 필리핀도 1571년부터 1898년까지 긴 시간에 걸쳐 스페인 식민지 시대를 겪어야 했다.
1571년,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는 필리핀이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이때 스페인이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은 목적은 3G(Gospel, Gold, Glory)로 정리된다. 식민지에 신의 복음(Gospel)을 전파해 이를 매개로 경제적 이득(Gold)을 취함으로써 왕권(Glory)을 강화하는 것이다. 스페인은 가톨릭 교회 안에서 종교로 통합된 마을을 만들어서 식민 지배체제를 강화했다.
16세기 말 스페인에서는 멕시코 등지에서 채굴한 은을 마닐라로 가지고 온 뒤 중국의 비단이며 도자기 등과 바꾸었다. 하지만 갤리언 무역이 쇠퇴하면서 점차 동서양 무역의 거점으로서 필리핀의 이용 가치가 줄어들게 되자 스페인에서는 필리핀을 농작물 생산기지로 전환한다. 아시엔다(대규모 농장)를 통해 담배와 사탕수수, 아카바 등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부를 획득한 이들 중에는 메스티조(mestizos) 혼혈인도 많았는데, 대농장 경영을 통해 축적한 재산을 바탕으로 필리핀 사회의 상류계층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일루스트라도 계층의 탄생
직업과 인종은 다양했지만, 새로운 출현한 중상류층은 자식에게 대학 교육을 시킬 수 있을 정도로 재력이 풍부했고, 교육열도 높았다.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며 유럽과의 왕래가 쉬워지면서 자녀들을 유학 보내는 가정도 늘어났다. 어릴 때부터 스페인어로 교육을 받고 유럽에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사상을 접한 이들은 일루스트라도(Ilustrado)라고 불리는 새로운 의식을 지닌 계층이 되었다. 서구식 교육을 통해 습득한 지식과 경제력을 모두 갖춘 엘리트 계층이었다.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호세 리잘(Jose Rizal)을 비롯하여 필리핀 국가인 루팡 히니랑(Lupang Hinirang)의 가사를 쓴 호세 팔마(José Palma), 필리핀-미국 전쟁에 참전했던 안토니오 루나(Antonio Luna), 필리핀 최초로 타갈로그어 일간지를 만들었던 마르셀로 델 필라르(Marcelo del Pilar) 등이 모두 일루스트라도스(Ilustrados)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필리핀 민족주의운동
일루스트라도스는 스페인인이나 중국인을 아버지나 어머니로 둔 메스티조(혼혈인)으로 근대식 고등교육을 받아 완전히 서구화된 사상을 가지고 있던 엘리트 지식인 계층이었다. 그런데 유럽에서의 유학 경험은 식민지 청년들에게 식민지 필리핀의 억압적인 현실과 모순을 인식하게 했다. 하지만 식민지 국민으로서의 한계를 느끼고 스페인의 식민통치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호세 리잘 등 일루스트라도스가 원한 것은 스페인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이 아닌 스페인 출신의 식민지 지배층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는 것이었다. 즉, 이들이 스페인에 요구했던 것은 평등과 자유, 정치와 가톨릭 종교의 분리 등이었을 뿐 스페인의 지배체제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들은 무장을 통한 봉기와 저항이 아닌 평화적이고 온건한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기를 원했다.
일루스트라도스는 스페인에게 자치권 등과 같은 여러 가지 권한을 권리를 요구했지만 이를 거절당하는 과정에서 필리핀 ‘민족’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게 된다. 특히 1872년 곰부르자 신부가 처형당한 사건은 일루스트라도스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일루스트라도스는 스페인을 대상으로 한 민족주의 반식민지 운동의 핵심으로 활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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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CP(National Historical Commission of the Philipp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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