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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민다나오: 아포산의 하리본 독수리와 호수가 많은 땅의 모로족
⚐ 최종 업데이트:
2020년 4월 21일
필리핀에서 가장 높은 산은 어디일까?
정답은 민다나오 섬에 있는 아포산(Mountain Apo)이다. '모든 산의 아버지'라는 애칭을 가진 아포산은 해발 고도 2,954m를 자랑하는 활화산이다. 원래 4,000m도 넘는 높은 산이었지만 화산 폭발로 키가 작아졌다나. 그래도 여전히 필리핀 최고봉이며, 말레이시아 사바주에 있는 키나발루산(4,101m)에 이어 남아시아에서 둘째로 높은 산이다.
그런데 백두산 장군봉(2,750m)보다도 높은 이 산에 원주민들만 사는 것은 아니다. 민다나오의 아포산은 필리핀 독수리(Philippine Eagle)의 주요 서식지이다. 하리본(Haribon)이라고 불리는 이 독수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독수리'로 알려진 독수리로 몸길이가 1m 이상 된다는 아주 커다란 독수리이다. 민다나오 섬에는 호랑이나 사자, 곰 등이 없어서 먹잇감을 놓고 경쟁할 상대가 없는 데다가, 평균적으로 40~60년 정도를 살 수 있기에 열대 우림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하리본은 길이 2m가 넘는 튼튼한 날개로 숲을 날아다니면서 박쥐, 뱀 등을 잡아먹고 사는데, 원숭이도 한입에 채간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하리본도 개발의 흐름을 이길 수 없었다. 1970년대 이후 도시 개발과 플랜테이션 농장 확대 등으로 인해 숲이 사라지면서 개체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어 치명적인 멸종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필리핀 정부에서 1995년에 하리본을 필리핀 국조로 지정하고, 필리핀 독수리재단(Philippine Eagle Foundation)을 만들어 독수리 보호에 힘쓰고 있지만, 일부일처제 동물인 데다가 2년마다 1개의 알을 낳을 수 있어서 개체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는 힘들다고 한다. 암튼, 필리핀에서 가장 높은 산의 꼭대기를 차지한 것은 필리핀을 상징하는 잘생긴 하리본 독수리들이다.
호수가 많은 땅, 민다나오
'민다나오'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화산호(화산의 화구에 물이 고여 생긴 호수)가 많은 섬의 자연적 특징을 보았을 때, 마긴다나오('호수가 많은 땅'을 의미)라는 단어에서 민다나오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가장 유력한 가설로 보인다.
수많은 화산 때문에 화산과 지진의 위협을 종종 받기도 하지만, 천혜의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어 약속의 땅(Land of Promise)이란 애칭으로 불리기도 하다. 비옥한 토양과 풍성한 열대우림, 거기에 다양한 동식물까지 두루 갖추고 있는 데다가 땅 아래에는 천연가스, 금, 철, 망간, 크롬 등 천연 지하자원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그뿐인가. 1년 내내 고온 다습한 열대 우림 기후인 데다가 태풍권에서 벗어난 지역에 있기에 농작물 재배에 있어서 최적화된 조건을 가지고 있다. 민다나오섬 남동부에 있는 '다바오'의 이름은 '무더위'라는 원주민 언어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는데, 그 뜨거운 열대의 더위 속에서 포멜로와 두리안 등 열대과일이 얼마나 잘 자라나는지, 바나나, 파인애플, 카카오, 커피 등과 같은 농작물을 대규모로 재배하는 상업적 농업농장(플랜테이션 농장)을 섬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민다나오에 대해 "위험한 곳"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만, 한국인의 식탁에 오르는 파인애플과 바나나의 상당수는 민다나오에서 생산된 것이다. 다국적 식품 기업인 델몬트(Del Monte)와 돌(Dole)에서 민다나오 코타바토와 제너럴 산토스 등지에 바나나와 파인애플 플랜테이션 농장과 가공 시설을 가지고 있다.
모로족과 술루 술탄국
1500년대 후반, 스페인 사람들은 민다나오섬에 사는 이슬람교도의 원주민을 통칭하여 무어인(Moors)이라고 불렀다. 인종학적인 의미 없이 이슬람을 믿는 여러 원주민 부족들을 한꺼번에 가리키는 호칭이었다. 지금도 민나다오에 사는 무슬림을 통틀어 모로족(Moro People)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마긴다나오족(Maguindanao), 타우숙족(Tau Sug), 마라나우족(Maranaw 또는 Maranao로 표기), 칼라간족(Kalagan) 등 열 개도 훌쩍 넘는 원주민으로 나누어진다.
아랍의 상인들을 통해 민다나오 지역에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들어온 것은 14세기, 한국(당시 고려)에서 황산대첩이 일어나 이성계가 왜구를 격파하느라고 힘썼을 시기이다. 1380년 정도에 전파된 이슬람교는 1457년에 술루 제도에 술루 왕국(Sultanate of Sulu)을 세우게 했다. 아랍어를 공용어로 썼다는 술루 술탄국은 술루해의 섬 대부분을 지배하면서 민다나오 지역에 화려한 이슬람 문화가 꽃피우게 했다. 이들은 필리핀 다른 지역과 확연히 구분되는 문화와 관습을 쌓아나갔는데, 당시 유물을 보면 얼마나 화려하고 정교한지 저절로 감탄사를 불러일으킨다. 심장을 두들기는 듯한 마긴다나오(Maguindanao)의 전통 노래를 들으면, 정부 차원에서 제대로 된 자료 정리가 되지 않고 있음이 안타까울 정도이다.
하지만 모로족이 만들어낸 화려한 이슬람 문화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1571~1898)가 시작되면서 힘을 잃어갔다. 술루 술탄왕국과 마긴다나오 술탄왕국은 독립에 힘썼지만,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술탄왕국은 모두 스페인의 지배권에 놓이게 되었다. 필리핀을 지배한 스페인 사람들은 종교적인 이주 정책을 펼쳤고, 민다나오 사람들은 상당수 가톨릭으로 개종당하였다. 미국·스페인 전쟁(1898년) 이후 미국에서 개신교가 들어와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치면서, 이슬람교는 점점 갈 곳을 잃어갔다. 그래도 무슬림은 살아남았다. 알라신의 자비와 은혜에 감사하며 하루에 5번 예배를 드리면서, 코란을 따르고 여섯 가지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종교를 앞세운 전쟁과 경제 파탄
민다나오는 필리핀 내 그 어떤 지역보다도 우수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낙후된 경제기반을 가지고 있다. 어업, 농업 등 일차 산업 종사자가 압도적으로 높은 것을 어찌 농사짓기 좋은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볼 수 있겠는가.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지를 차례로 거치면서 이슬람은 이단처럼 취급당하기 시작했다. 마닐라 등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대거 민다나오로 이주하여 땅을 사들이면서 강제 포교에 나섰고, 필리핀 정부에서는 지역 사회 불안정을 이유로 민다나오를 개발에서 제외했다. 국가 개발 정책에서 소외되면서 지역경제는 서서히 죽어 나갔다.
가톨릭과 기독교가 주류인 사회에서 이슬람 신앙과 문화를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이었는지는 모로족 사람들만이 알겠지만, 지역 차별은 노골적이고도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독특한 향토 문화와 종교에 대한 편견에 시달리던 모로족은 분리 독립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군과 무슬림 단체의 오랜 분쟁 속에서 섬은 황폐해져만 갔다. 수십 년에 걸친 오랜 내전은 풍부한 이슬람 문화유산을 사라지게 했고, 경제 파탄을 불러일으켰다. 그 모진 세월 속에서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당해야 했는지 그 수를 누가 정확히 알겠느냐마는 난민의 수만 300만 명 이상을 헤아린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필리핀 정부에서 차별 정책을 펼치도록 만들었는지 아니면 필리핀 정부의 억압과 차별이 이슬람 극단주의자를 만들었는지 그 순서를 알 수는 없지만, 종교를 앞세운 전쟁이 민다나오 지역 경제의 발목을 잡은 것은 사실이다. 수십 년에 걸친 내전 속에서 경제적 후진성을 면치 못한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현재 민다나오는 필리핀에서 실업률이 가장 높으면서도 평균수명이 가장 낮은 곳이 되었다. 인프라는 취약하고 문맹률은 높다. 풍부한 천연자원의 주인이 누구냐를 따지는 동안 부패와 빈곤, 납치, 살인이 자행되었고, 굶주림으로 인한 사망자는 늘어갔다. 그러면서 민다나오는 "안전하지 않은 곳"이란 꼬리표를 달게 되었다. 하지만 민다나오 분쟁 자체를 종교 분쟁 혹은 종파 분쟁만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슬람이란 종교가 모로족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이기 하지만, 민다나오 내전이 오롯이 종교 때문에 일어났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이야기이다. 분리독립 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유혈 분쟁이 벌어져서 민다나오라고 하면 이슬람 반군의 본거지라는 인식이 강해졌지만, 민다나오 사람들을 모두 극단적인 테러 집단처럼 여기는 것은 슬픈 오해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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