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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닐라 생활: PNR 기차와 블루멘트릿 기차역 옆 재래시장
⚐ 작성일:
2019년 10월 18일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에. 그러니까 2007년도 1월에 미국에서 등장한 작은 물건이 있다. 철저한 채식주의자로 히피 공동체 생활을 하다가 승려가 되려 했다던 남자, 애플의 최고경영자였던 스티브 잡스의 청바지 주머니에서 나온 그것은 바로 아이폰이었다. 애플에서 내놓은 그 검은색의 작은 물건은 통화하고,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정도였던 휴대전화를 생활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스마트폰이라는 이름의 물건이 세상 사람들의 손에 쥐어지게 된 것이다. 스마트폰은 멋졌지만, 모든 것이 멋질 수는 없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사람들 입에서는 스마트폰 중독으로 인한 문제점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스마트폰 중독이 마약 중독에 비견될 만큼 심각해졌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핸드폰 없이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아진 세상이 와버렸다. 나는 친구와 만날 때 미리 약속 시각을 문자메시지로 보내지 않고 찾아가는 일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런 나로서도 핸드폰이 있으면 편한 물건이 된다. 게임이나 카톡과 같은 것은 하지 않지만, 음악도 듣고, 시계도 볼 수 있다.
지금은 공룡시대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그 시절, 그러니까 시간 단위로 쪼개 무언가를 하면서 살 때의 이야기지만 내게도 손목시계라는 것이 필수품이었다. 수시로 시간을 확인하고, 시간대별로 무언가를 해야 바람직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느낄 때였다. 요즘의 나는 바쁘게 움직이기 위해서 시계를 보는 일이 거의 없다. 대신 창문을 통해 주변이 어둑해지는지를 보고 저녁이 왔음을 느낀다. 그러니까 하루 중에서 내가 시계를 보는 때는 저녁밥 먹을 시간인지 확인할 때 정도이다. 하지만 그런 나도 시계를 열심히 보고, 시간 계산을 할 때가 있다. 바로 PNR(Philippine National Railways) 기차를 탈 때이다. 기차 시간을 놓치면 적게는 30분에서 길게는 한 시간 가까이 하릴없이 기다려야 하니 기차 시간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2019년이 거의 저물어 가고 있지만, PNR 기차는 6년 전과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기찻길 주변으로 졸고 있는 길고양이가 보이는 것조차 똑같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대중교통 인트라 구축을 외치기 시작한 뒤 기차역의 정류장은 좀 개선되어서 탑승하기는 편해졌지만, 기차 자체는 하나도 나아진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좀 더 지저분하고, 먼지가 더 많이 쌓인 느낌이다. 객실 내 노선도는 다 떨어져서 먼지투성이인 데다가, 어찌 된 연유인지 문을 나무판자로 막아둔 것도 보인다. 그뿐인가. 배차 간격 길고, 에어컨 없이 덥고, 소음 심하고, 사람으로 꽉 차서 타기도 힘들고... PNR 기차가 가진 단점은 상당히 많다. 기차가 노후 돼서 그렇겠지만, 크게 속도를 내지도 못하여서 "바나나는 길어 길면 기차 기차는 빨라"라는 노래를 거짓으로 만들기까지 하는 판국이니 아무리 긍정적으로 보려고 해도 요금이 저렴한 것 말고는 장점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도 크게 불평할 수 없는 것은 이용료가 고작 15페소(한국 돈으로 약 350원)이기 때문이다. 마닐라에 처음 살기 시작한 2014년 즈음에 10페소였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그동안 5페소(약 100원)에 올랐을 뿐이다. 차라리 요금을 좀 더 올리고 LRT 지상철처럼 시설 개선을 좀 했으면 싶기도 하지만,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할 리가 없다. 나로서는 한번 타고나면 몇 달은 이용할 생각이 나지 않지만, 이 기차를 매일 타고 출퇴근하는 이도 분명히 있을 터인데 10페소씩만 올려도 한 달이면 적잖은 돈이 된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PNR 기차를 탄 것은 블루멘트릿 기차역(Blumentritt railway station)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이 시장에서 문어를 파는 아주머니 한 분에게 붙잡혀서 문어를 왜 살 수 없는지에 대해 장황하게 떠든 기억이 나서 아직도 문어를 파시나 궁금했다. 치안이 좋지 못하다고 소문이 난 곳이 그쪽 동네인지라 시장에 가면서도 돈을 챙기지 않았었다. 시장 구경을 하러 간 것이지 무언가 장을 보러 간 것은 아니었으니, 주머니에 고작 2백 페소 정도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외국인 여자가 돈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비싸서 그런다고까지는 이해를 했지만, 20페소 정도 깎아주면 금세 사서 가리라고 판단을 했는지 무척이나 적극적으로 문어가 얼마나 맛있는지 이야기를 해오셨다. 나는 한참 만에야 정말로 가진 돈이 없음을 아주머니에게 이해시키고 자리를 뜰 수 있었다.
그리고 가진 돈을 탈탈 털어 바나나를 사서는 무겁게 집으로 들고 와서는 얼른 쓰레기통에 버려야 했다. 내리기도 힘들 정도로 사람으로 꽉 찬 기차 안에서 바나나가 온전히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 뭉개진 정도가 심해서 도무지 먹을 수 없었다. PNR 기차를 탈 요량이면 바나나를 사지 말아야 한다는 그때의 깨달음을 떠올리면서, 혹 문어 장수 아주머니를 만날까 봐 지갑에 돈을 넉넉히 챙겨놓고 산타 크루즈의 블루멘트릿 기차역으로 갔지만, 상당히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기차 시설은 하나도 변함이 없었지만, 기찻길 옆으로 시장으로 이용되던 대로가 모두 휑하니 비어 있었다. 마닐라 시장이 이스코 모레노 도마고소로 바뀐 뒤 마닐라에서 요즘 진행 중인 동네 정화 작업의 바람이 이곳까지 휩쓸고 지나간 모양이었다. 길을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노점상 상인들로 북적여서 그저 시장인 줄만 알았던 길에 자동차가 쌩쌩 달리고 있으니 어안이 벙벙할 정도이다. 도시 정화 작업은 분명 반가운 일이지만, 그래도 문어 아주머니가 대체 어디에 가서 문어를 팔고 있을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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