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피나투보 자유여행: 화살과 티나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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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텐츠 등록일:
2019년 12월 29일
시작점을 알 수 없는 물안개가 광활한 들판을 가득 감싸고 있었다. 하늘은 이내 푸르게 개었지만, 안개 덕분에 길이 참기름을 바른 듯 미끄러워져서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타루칸 마을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지만, 언덕길이 온통 크고 작은 돌투성이라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언덕을 오르기 쉽지 않다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의견이다.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따족 아이들은 날아가듯 뛰어가서는 "나를 잡아보세요!"라며 나를 놀리곤 했다. 가끔은 발걸음을 멈춰 나를 기다려주면서 깔깔 비눗방울과 같은 웃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언제 들어도 듣기가 좋기만, 그렇다고 흙투성이 언덕길을 오르는 일이 쉬워지진 않았다. 가끔 꼬마 녀석들과 속도를 맞춰 언덕을 오르는 욕심을 내보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슬리퍼를 신고 있어서 그렇다고 변명해보지만, 아이들은 맨발로도 뛰어다니니 큰 변명거리가 되지 못한다.
필리핀 로컬 빵집의 빵은 빵 냄새가 강하지 않은 편이지만, 그래도 몇백 개를 한꺼번에 모아놓으면 그 냄새가 제법 근사하다. 빵 봉지에서 설탕 냄새가 솔솔 풍기고 있었다. 아이들은 얼른 언덕을 올라가서 티나파이(빵)를 먹고 싶은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내 둔한 운동신경이 갑자기 좋아질 리가 없다. 길이 상당히 미끄럽기에 평소보다도 더 천천히 걸으면서 빵 봉지가 무거우니 먼저 올라가라고 손짓으로 일렀다. 아이들을 다 보내고 혼자 남아 흡사 나무늘보처럼 걸었건만, 그래도 발가락 주변이 온통 흙투성이가 되었다. 그리고 왼쪽 발에 묻은 것은 색이나 질감이 아무래도 소똥 같았다. 하지만 소똥을 밟았다고 하여 마냥 기분 나빠할 것은 아니다. 입구 집에 들어가서 대충 발을 씻고 나오다가 로로(타갈로그어로 '할아버지'라는 뜻)가 무언가를 만들고 계심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로로가 만들고 계신 것은 화살이었다. 화살을 만드는 준비물은 실로 간단해서, 길쭉한 나뭇가지와 장식용 닭털이 전부였다. 도구는 다용도 만능 칼 하나. 나머지는 로로의 솜씨에 달려있다. 모퉁이가 닳아버린 커다란 칼은 무뎌 보였지만, 보기보다 날카로운지 로로의 주름진 손에서 나뭇가지 끝이 매끄럽게 다듬어졌다. 로로 옆에 쭈그리고 앉아 화살 만들기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롤라(타갈로그어로 '할머니'라는 뜻)가 뭐라 뭐라 설명을 해주시는데 무슨 이야기인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이걸 만들어서 새를 잡는다고 이야기하시는 것 같았다. 마녹(닭)을 잡느냐는 내 멍청한 질문을 들으시더니 집 안으로 가서 만들어 두었던 활을 꺼내와서 보여주면서 하늘을 향해 활 쏘는 시늉을 해주신다.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아무것도 아닌 나뭇가지가 화살로 변하는 것은 보기만 해도 썩 즐거워서 넋을 놓고 보고 있다가 아이들이 우르르 오는 소리에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켰다. 화살이 완성되기까지 지켜보고 싶었지만 당장 할 일이 있었다. 꼬마 녀석들을 위해 빵 봉지를 풀러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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