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피나투보 자유여행: 로사 아빠의 그린 파파야 수프 (아이따족 원주민 집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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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텐츠 등록일:
2019년 10월 20일
뭐든 자주 하면 익숙해지는 법이다. 타루칸 마을에 처음 다니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군사 훈련이 있다고 마을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면 할 일이 없어 빈둥대기 일쑤였지만, 요즘 나는 군사 훈련이 있다고 하면 바로 로사네 집에 쪼르르 가버린다. 아이들 노는 것도 보고, 어슬렁대며 마을 사람들 집도 구경하고, 갓 태어난 강아지의 말랑한 뱃살을 만질 기회도 얻는다. 쌀을 가져다주어도 시원찮을 판이지만, 밥도 얻어먹는다.
일전에 사다 준 소금이며 설탕을 다 먹었을지 궁금하여 앞집 부엌에 들어갔는데, 로사와 꼬마 녀석들이 동네 안내를 자처하고 나섰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나의 방문을 사진 촬영의 기회로 여겼다. 때아닌 가족사진 촬영이 힘들어서 집 구경을 그만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로사가 꽤 신난 모습이라 잠자코 함께 동네 구경을 했다. 정답게 웃으면서 제가 먼저 쪼르르 달려가 문을 열어주면서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는데 어찌 그 안내를 거절하겠는가 말인가. 아이들은 뭐라 뭐라 떠들어 대면서도 내가 자기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은 아이따족 말로, 나는 한국말로 제각기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동네 집 구경을 했다. 세간살이가 이렇게까지 없을까 싶을 정도로 가난한 살림살이지만, 그 와중에 선반을 만들어 놓고 잡동사니를 깔끔히 정리한 집도 눈에 띈다. 그동안 종이 상자를 달라고 아우성을 치기에 어디에 쓰나 했더니 옷을 담아두기도 하고, 카펫처럼 바닥에 깔아두기도 했다. 땅에서 습기가 올라오는지 중요한 물건은 모두 천장 쪽에 매달아 둔 모습이다. 모퉁이 아저씨네 집의 벽에는 달력도 걸려 있었는데, 날짜를 보고자 함이 아니라 비키니를 입은 아가씨 사진을 보기 위함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그런데 집 구경도 쉽지 않다. 사진을 찍어가면 인화하여 가져다준다는 것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이 자꾸 붙잡고 자기 가족사진을 찍자고 하는 통에 집 구경하는 시간이 사진 찍는 시간으로 변해버렸다. 집 안은 어둡고, 마을 사람들 피부는 검으니 사진찍기가 쉽지 않은데 마을 사람들이 그런 것을 알 리가 없다. 결국 온통 시커멓게 찍힌 사진을 보고 나서야 집 바깥으로 나가서 사진을 찍자는 내 말을 이해했다.
그런데 무언가를 본다고 하여 상황이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나처럼 상식이 부족한 인간은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꼬마 녀석들과 함께 마을을 어슬렁대면서 돌아다닐 때 로사 아빠가 나무에서 무언가를 따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그게 파파야였을 줄이야. 파파야는 주황색에 가까울 정도로 노랗게 푹 익어야만 먹는 것으로 배웠던 나로서는 시퍼런 파파야를 따다가 뭐에 쓰나 싶었지만 그건 무식한 생각이었다. 마을 구경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로사 아빠가 마당에 앉아 파파야로 반찬을 만들고 있었다. 숟가락을 이용하여 쌀알과 같은 파파야 씨를 다 긁어내고, 잘게 썰어 깨끗이 물에 씻은 뒤 냄비에 넣고 국처럼 끊여내는 간단한 요리였다. 물론 파파야만 가지고는 먹기 어렵다. 하지만 소금 한 숟가락과 아지노모토 화학조미료 한 숟가락, 거기에 말룽가이(malunggay) 잎이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소박한 식재료가 제법 짭조름하고 맛있는 반찬이 된다. 로사 아빠 옆에 앉아 말롱가이 잎을 함께 다듬을 때만 해도 맛에 대한 기대감이 전혀 없었던 주제에 한 숟가락 맛을 보고 나니 갑자기 식욕이 동했다. 때마침 로사 엄마가 "밥을 먹을래?"라고 묻기에 냉큼 밥을 받아들고 맛나게 먹어 치우는데 동네 바랑가이 캡틴 아저씨가 헐레벌떡 뛰어오시더니 나를 찾았다. 군사훈련이 잠깐 멈춘 상황이니 이때를 이용하여 재빨리 마을을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밥을 절반밖에 먹지 못했는데 숟가락을 내려놓으려니 아쉽다. 국이라도 한 숟가락 더 먹으려고 부지런히 숟가락을 움직여 봤지만, 국물이 뜨거워서 먹기가 쉽지 않다. 나는 입안에 파파야를 최대한 잔뜩 욱여넣고, 감사한다는 말을 급하게 남긴 채 언덕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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