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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닐라 생활: 그래서 바클라란 시장은 왜 갔었는데
⚐ 작성일:
2019년 9월 26일
땀을 줄줄 흘리는 나를 보더니 냉장고에서 마운틴듀 한 병을 꺼내 쥐여주고는 나의 잘나신 친구 왕완딩 씨가 하는 말이 하늘이 흐린 것이 곧 비가 내릴 것 같다나. 나는 내가 오늘 아침에 빨래를 잔뜩 해서 바깥에 걸어놓고 나왔으니 비가 올 것 같다고 심드렁하게 대꾸를 해주었지만, 속으로는 비가 내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남은 음료수를 벌컥 마셔버렸다.
일전에 따루칸 마을에 갔을 때 꼬마들이 내게 구슬을 자랑하던 것이 생각나서 구슬을 사려고 파라냐케에 있는 바클라란 시장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친구가 구슬치기하던 것을 부럽게 바라보던 꼬마 녀석에게 알록달록한 구슬을 한 주먹 쥐여주고 싶었다. 신문에서 바클라란 시장 주변으로 노점상을 없애고 환경 정화 작업을 완료했다고 떠들어서 얼마나 청소를 했기에 그러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메트로마닐라개발청(MMDA)에서 바클라란 시장(Baclaran Market) 주변으로 도로 정리를 했다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한참 전부터이지만, 잠깐 깨끗해졌을 뿐 획기적으로 변화된 것은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크게 기대감은 없었다. 높은 양반이 왔을 때 눈요기용으로 잠깐 주변을 싹 치운 것일 수도 있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필리핀 내무부(DILG)에서 직접 나서 지방 정부 기관에 7월 29 일부터 60일 이내에 도로 장애물을 제거하라고 명령하였고, 그에 따라 바클라란 시장 주변을 비롯하여 마닐라 곳곳에 있는 공공도로의 불법 구조물이 눈에 띄게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바클라란 시장은 내가 알던 그 시장이 아니었다. 사람들로 바글대어서 걸어가기도 힘들었던 곳이 완전히 텅 비어 있었으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을 정도이다. 이미 10월이 눈앞에 와 있으니 크리스마스 대목을 앞두고 한참 북적여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조용하다니. 거리가 한가하다 못해 썰렁할 정도라서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그동안 바클라란 시장에 수십 번은 가봤을 터인데, 시장 골목 안이 이렇게까지 깨끗하게 치워진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신기할 정도이다. 하지만 깨끗함에 대해 반가움은 잠깐이고, 썰렁한 분위기에 대해 아쉬움은 길었다. 모름지기 바클라란 시장이라고 하면 혼잡에 가까울 정도로 복잡한 와중에 조잡한 물건을 사는 재미로 오는 것인데 마카티 그린벨트 쇼핑몰보다도 걸어 다니는 사람이 없으니 이래서야 시장 구경하는 재미가 하나도 없다. 바클라란 시장 특유의 혼잡함을 꽤 좋아했던 터라 어쩐지 마음이 서운하기까지 하다.
그나저나 구슬이 문제이다. 거리의 장난감 노점상 아저씨에게 구슬을 사려고 생각했는데 장사꾼 아저씨들이 싹 사라져 버렸으니 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상가에서 장난감 가게를 하나 찾아냈지만, 내가 구슬을 영어로 뭐라고 부르는지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난감 가게의 직원은 이제 갓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상당히 어려 보였는데, 내가 무엇을 사고 싶어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좀 더 효과적으로 설명을 하기 위해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구슬 튕기는 흉내를 내는 나를 보고 방긋 웃기만 하는데, 아무래도 날 좀 모자란 외국인으로 생각하는 얼굴이다. 나는 직원에게 내가 구슬을 살 돈이 있으며, 미치지 않았다고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크게 믿어주는 얼굴이 아니다. 가게에서 다른 직원이 나와서 나를 보고 뭘 원하느냐고 묻기에 다시 한번 길바닥에서 구슬치기하는 흉내를 내봤지만, 왈라(없어)라는 답변을 들어야만 했다. 구슬 사는 것을 포기하고 시장을 빠져나오는데 갑자기 한국에서 한때 비드공예가 유행했던 것을 떠올랐다. 장난감 비드(bead)를 사고 싶다고 이야기하면 길바닥에 그렇게 쭈그리고 앉을 필요가 없었을 터인데 싶었지만 원래 이런 건 좀 나중에야 생각이 난다.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아쉬워해보았자 별 소용이 없으니, 리어카를 끌고 가던 사내아이를 불러 귤을 한 봉지 사는 것으로 시장 구경을 끝내기로 했다. 10페소짜리 귤은 크기가 작았지만 싱싱하고 달아서 두어 개 먹는 것만으로도 꽤 기운이 났다.
"그래서 시장은 왜 갔었는데?"
구슬을 사러 바클라란 시장에 갔었지만 설명하느냐고 진땀만 빼고 빈손으로 돌아왔다는 내 이야기를 듣고 나의 잘나신 친구 왕완딩 씨가 해주는 말이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설명했었어야 한다나. 자기 조카만 봐도 온종일 핸드폰을 가지고 놀지 구슬 따위는 가지고 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빅토리 파사이 몰 안에 가면 구슬 파는 곳을 찾을 수 있다고 알려준다. 빅토리 파사이 몰 안에서까지 쪼그리고 앉아 구슬치기 흉내를 내고 싶지 않은 나는 완완딩 씨에게 타갈로그어로 구슬을 뭐라고 하는지 물어보고 졸렌(JOLEN)이라고 한다는 것을 배우기를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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