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피나투보 자유여행: 바나나 수확과 알비노 카라바오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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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텐츠 등록일:
2019년 8월 18일
피나투보 화산 주변의 넓은 평야를 꽉 채운 것은 아침의 냄새였다. 아침 특유의 상쾌함에 시원한 바람의 냄새, 비를 촉촉하게 담은 풀의 냄새, 들판에 놓아 기르는 카바라오 소들이 움직이는 냄새가 가득 엉켜 있었다. 어두운 밤을 보내고 막 잠에서 깬 바람결은 시원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나는 매사에 싫증을 매우 잘 느끼는 편이지만, 타루칸 마을에 가는 일만큼은 좀처럼 질려 하는 법이 없었다. 타루칸 마을에 매달 드나든 지도 2년이 훌쩍 넘어 있었지만, 마을로 가는 일은 언제나 설레어서 한 달 정도가 되면 마을에 가야지 하는 마음에 심장이 간질대곤 했다. 마을에 가져다줄 장을 보고, 새벽녘에 일어나 덜컹대는 4X4를 타고 마을까지 가는 일이 고단하기는 하여도 아이들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지면 그깟 고단함 정도야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기도 했다. 큰 변화라고는 없어 보이는 타루칸 마을에 무슨 재밌고 색다른 일이 있을까 싶지만, 그건 화산 트래킹을 가는 도중 마을을 지나치며 흘낏 바라보는 사람들만의 생각이다. 언제나 매혹적으로 바뀌는 자연의 풍경 하나만 봐도 질리지 않는다. 배 속에 있던 아이가 카사바 열매 영글듯이 커가는 모습을 보는 일도 신비로운 일이다.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보았던 엄브렐라가 요즘은 혼자 서서 걸음마를 배우고 있었으니, 시간 참 잘 간다고 하는 말이 저절로 나오기도 한다. 아이따족 사람들은 수줍음이 매우 많은 편이지만, 자주 보면 그 수줍음의 농도도 연해진다. 그래서 저 멀리 산자락 아래에서부터 달려와 손을 잡으면서 반기는 아주머니의 손이 얼마나 따뜻한지 알 수 있다. 새로운 것이라고는 전혀 없을 듯하지만, 간혹 색다른 것을 보게 되는 날도 있다. 어제만 해도 멜라닌 색소 결핍증인 알비노(Albino) 현상으로 온몸이 온통 살굿빛인 카라바오(carabao) 소를 보았다. 그깟 소가 뭐 그리 신기할까 싶을 수도 있지만, 백색증 카라바오 소를 보는 일이 만날 있는 일은 아니다.
타루칸 마을 사람들이 바나나를 수확하여 파는 날이었다. 일요일이었고, 이제 갓 아침이 되었을 뿐이지만 마을 사람들은 매우 분주했다. 시내에서 도매상이 왔으니,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나나를 팔아야만 했다. 아직 우기가 끝나지 않았으니 팔 시기를 놓치면 여간 곤란하지 않은 것이다. 딸락 어딘가에서부터 타루칸 마을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는 남자는 이렇게 바나나를 사다가 시장에 가지고 가서 판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이 흔히 먹는 바나나 열매를 사서 가는 것은 아니었다. 바나나 풀의 줄기와 꽃 부분만 사서 간다고 했다. 남자는 마을 사람들이 바나나를 세 종류로 분류하여 비닐에 담도록 하고는 무게를 꼼꼼하게 재어 노트에 적고 있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물건의 무게를 알려주었던 것일까, 낡은 저울은 바늘의 움직임이 둔하기도 했지만, 모두의 시선이 바늘로 집중되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과 도매상 남자의 묘한 신경전이 느껴질 정도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저울의 움직임이 곧 돈이었던 것이다.
남자의 설명에 의하면 굿(GOOD)은 1kg에 12페소이지만 동동(DONGDONG)과 레드(RED)는 킬로그램당 7페소라고 했다. 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어 굿(GOOD)이 대체 뭐냐고 물었더니 바나나 줄기 부분은 굿이고, 꽃 부분은 동동과 레드라고 알려준다. 바나나의 심장(Hearts of Banana)이라고 부르는 꽃 부분이 완전히 붉게 되었으면 레드이고, 아직 덜 붉어진 상태라면 동동이라는 것이다. 나로서는 왜 꽃보다 줄기가 비싼지, 그리고 왜 줄기가 굿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남자의 설명은 명쾌했다. 바나나의 줄기 부분을 잘라서 시니강이나 시시그를 만들 때 넣어 먹으면 그 맛이 베리 굿이라는 것이다. 남자는 바칼(BAKAL)이라고 부르는 고철도 사고 있었는데, 고철은 1kg에 4페소라고 했다. 화산재만 가득할 뿐 황량하기까지 한 산골짜기 어디에서 고물을 주울 수 있을까 싶지만, 가끔 미국 군인들이 군사훈련을 하러 와서 이런저런 것을 버리고 가기 때문에 부지런히 움직이면 몇백 페소라도 만질 수 있는 모양이었다. 꼬마 녀석 하나가 한 줌의 고철을 가지고 와서 20페소(한국 돈으로 500원 정도)를 챙기고는 씩 웃었다.
들판을 돌아다니면서 쓸만한 물건이 있는지 확인할 만큼 부지런하지 못한 나는 팔 고철이 없었지만, 아이들에게 바나나 줄기 부분을 이용하여 풀피리 부는 것을 배워서 매우 신이 나 있었다. 손가락을 이용하여 새 소리 내는 방법도 배우고 싶은데 여간 어렵지 않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바보 취급을 당하기 싫어 어떻게든 소리를 내보려고 열심히 끙끙대고 있는데, 엄브렐라 엄마가 나를 부르더니 카라바오 소가 온다고 알려준다. 그 이야기를 핑계 삼아 손피리 흉내를 그만두고 고개를 돌려보니 산자락 아래에서부터 우마차 오는 모습이 보였다. 늘 시커먼 소만 보았던 나로서는 흡사 돼지와 같은 색을 가진 녀석이 매우 신기했다. 어찌나 신기한지 시선을 떼기 힘들 정도이다. 게다가 이 녀석, 매우 순하기도 하다. 작은 파리들이 수백 마리 몰려와 얼굴을 뒤덮고 있으면 화가 날 법도 한데 가만히 뜨거운 콧김을 내뿜을 뿐이다. 처음 보는 여자가 다가와서 등을 만져도 점잖은 얼굴로 가만히 서서 검은 소와 털의 색깔만 다를 뿐 그 감촉은 똑같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멀리 마을 입구에 세워둔 4X4 사륜구동차를 보니 마을 사람들이 이미 내가 가져온 빵이며 물건을 모두 옮긴 모양이었고, 사람들이 내가 나타나서 얼른 빵을 나눠주기를 기다릴 것이 뻔했지만 나는 우마차 주인이 일을 마무리하기를 기다렸다가 아이들과 함께 우마차에 올랐다. 덜컹, 우마차의 승차감은 무척 거친 데다가 예상외로 속도가 제법 빨라서 나도 모르게 어딘가 잡을 곳이 없는지 찾게 되었다. 나로서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지만, 아무렇지 않게 무심한 얼굴로 우마차 위에 앉아 있던 아이들 눈에는 내 모습이 꽤 우스워 보이는지 까르르 웃는다. 아이들이 놀리거나 말거나 나는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 우마차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걷는 것보다 힘들었지만, 알비노 카라바오 소를 타보았다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행복한 아침이었다. 그러니까 그 행복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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