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피나투보 자유여행: 햇살을 사랑하는 초록 바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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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텐츠 등록일:
2019년 6월 30일
이 나이에 깨닫기는 좀 늦은 감이 있지만, 나는 늘 좀 느리게 깨닫는 편이라서 늦게라도 깨달으면 되었다, 라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아무튼, 요즘 나는 자연의 신비란 대단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방 안에서 일주일을 머물면서 검은색만 슬금슬금 쌓이던 바나나였다. 타루칸 마을에서 받았을 때만 해도 진한 자연의 색으로 새벽녘의 차가움을 그대로 품고 있었는데, 바나나는 나와 함께 생활하는 동안 선명하고 어여쁜 초록색을 잃고 점점 시커멓게 변해버리고 있었다. 색깔이 미워진 바나나는 맛도 참 없었다. 아니, 맛이 없었다기보다는 먹지 못할 음식에 가까웠다. 익지 않은 야생의 바나나는 덜 익은 땡감보다도 떫었다. 어찌나 떫은맛인지 입안에 든 것을 황급히 뱉어내었을 정도이니, 아무리 배가 고파도 먹지 못할 듯했다. 설상가상으로 껍질에서 검은 가루마저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타루칸 아저씨의 정성이 아까워서 버리지도 못하고 어쩌나 하다가 혹시 몰라 집 바깥에 걸어두기로 했다. 그런데 바나나에게는 집 밖으로 내몰린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이틀분의 햇살을 받더니 바나나 특유의 달큰한 향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태양의 힘이란 그야말로 만만세라고 할까. 아래서부터 위로.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눈에 보일 정도로 노랗게 익어가는 바나나를 본다는 것은 무척이나 기분 좋은 일이라 수시로 봐도 질리지 않았다. 내게 바나나를 주고 싶어서 잊지 말고 꼭 가지고 가라고 세 번이나 말씀해주셨던 타루칸 마을 아저씨의 주름 가득한 웃는 얼굴이 생각하면서 바나나가 덩실덩실 웃고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나는 뜨거운 햇살과 살랑대는 바람을 품고 있는 바나나를 줄기에서 툭 떼어내 우물우물 먹으면서 참 달고 맛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알고보면 바나나는 나무가 아니다. 그 크기가 크고, '바나나 나무'라는 말이 익숙하여서 나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사실 알고보면 바나나는 씨앗을 가진 여러해살이풀에 불과하다. 원래 씨앗이 잔뜩 있는 풀인데, 먹기 힘든 씨앗을 빼고 품종 개량을 하여서 오늘 날 우리가 먹는 바나나가 되었단다. 가끔 바나나가 멸종 위기에 닥쳤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건 바나나가 풀이라서 병이 들면 일순간에 모두 죽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아무튼, 가끔 시골길을 지나가다 바나나를 사고 싶은 유혹을 견디기 힘들 때가 있다. 누가 보아도 상품 가치가 높아보이는 큼지막한 크기의 바나나를 보았을 때는 아니고 여러 송이가 달린 다발로 된 바나나를 보았을 때이다. 바나나가 가게 천장 끝에 탐스럽게 메달려 있는 것을 보고 뜬금없이 바나나가 사고 싶어지면 순순히 사는 수 밖에 별 도리가 없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다발로 된 바나나가 일반적인 바나나보다 맛이 더 좋은 것은 아니다. 남김없이 깨끗하게 다 먹지 못하고 버리는 일도 허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번히 탐을 내는 것은 순전히 그 모양이 보기 좋아서이다. 풀과 같은 초록색이 서서히 노란색으로 물드는 것을 보면 흐믓한 기분마저 드니 바나나 다발을 보면 지갑을 꺼내고야 만다. 그리고 가방 무거운지 모르고 욕심을 내어 열심히 집으로 들고 와서 다발채로 벽에 걸어놓고, 색 감상에 집중한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먹기는 해도, 원체 양이 많기 때문에 다 먹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다. 좀 부지런해지는 날은 껍질을 까서 냉동실에 넣어두고 아이스크림처럼 먹기도 하고 우유에 넣어 먹기도 하지만 완벽하게 다 먹어치우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단돈 몇 십 페소에 며칠이 행복하니,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시골에서 바나나 한 다발을 사고 나면 스타벅스에서 파는 커피 한 잔 가격에 대한 마음이 달라지지만 뭐 어쩔 수 있나. 에어컨 아래 마시는 도시의 커피와 뜨거운 온기가 담겨있는 시골의 바나나 사이에는 지구에서 달로 가는 정도의 거리감이 존재하는 법이니, 바나나를 먹을 때는 바나나 때문에, 커피를 마실 때는 커피 때문에 행복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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