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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언어: 영어나 타갈로그어가 아닌 마음에서 나오는 말

⚐ 최종 업데이트:

2024년 7월 31일

"오봉에 찌짐 좀 담아온나. 정지 단디 차아래이."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완벽한 서울 아가씨던 서울댁 아주머니가 집에서 한참이나 먼 지방으로 시집을 가서 아직 새댁이라는 호칭이 낯간지러웠을 시절, 그 시집살이가 얼마나 독하였는지 곧잘 아주머니의 눈시울을 붉게 물들이게 했다. 손가락 끝은 눈물로 반짝이기 일쑤였고, 야단맞는 소리가 담장을 지나 동구 밖까지 소문이 날 지경이었다. 만날 야단만 맞는 며느리도 속이 상했지만, 시어머니 처지에서도 할 말은 있는 법. 주방을 치우라고 하는데 며느리가 멀뚱한 얼굴로 쳐다만 보고 있으니 부아가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은 많은 일에 있어 약이 된다. 시간은 서울댁 아주머니의 고된 시집살이에 관한 이야기에 대한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에도 약이 되어 주었다. 서울댁 아주머니가 "밥 퍼어득 무라"는 시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재빨리 밥그릇을 비울 수 있게 될 즈음이 되자 시집살이의 고됨도 조금씩 풀려나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갓 시집온 새댁이 주방에 가서 작은 그릇 하나 제대로 가져오지 못한다고 노상 혼났다는 서울댁 아주머니의 고된 시집살이는 사실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다. 서울 촌사람이었던 그녀가 정구지 찌짐 해묵자는 시어른의 이야기를 대체 어떻게 알아듣겠느냐는 말인가. 결국 의사소통의 문제가 컸다는 이야기였다.


필리핀 여행을 하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가끔 내가 서울댁 아주머니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마닐라를 벗어나서 멀리 시골로 여행을 가면 갈수록 그런 마음은 더해졌다. 붙임성 좋은 필리핀 꼬마 녀석들이 뭐라고 친근하게 말을 걸어주면 열심히 알고 있는 타갈로그 단어를 죄다 내밀어 보지만, 워낙 밑천이 짧으니 금세 할 말이 사라진다. 게다가 타갈로그어를 '꼰띠랑(조금 할 줄 알아)'이라고 해보았자 내가 불성실한 태도로 대충 몇 마디 배운 타갈로그어를 아이들이 모를 때도 있다. 그러니까 타갈로그어는 그 지역 아이들이 쓰는 말은 아닌 것이다. 


섬마다 제각각 각기 다른 언어가 쓰이고 있는 7천 개가 넘는 섬나라 필리핀. 예전에야 섬 사이의 이동이 쉽지 않았을 터이니 섬에 따라 다른 언어를 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수십 개도 아닌 180여 개의 각기 다른 토착(aboriginal languages)가 존재한단다. 지금이야 바다로 혹은 산으로 갈라져 있으니 이렇게 말이 다를 수밖에 없었겠다고 이해를 하지만, 처음 필리핀 여행을 시작하면서는 일로일로 사는 분들이 세부에 사는 친척들과 같은 언어로 대화하지 못하여서 영어를 사용한다는 이야기는 어쩐지 기묘하게까지 들렸다. 그러니까 같은 필리핀인이라도 섬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 대화가 안 될 수 있다는 것이지?


1987년 헌법에 따르면 필리핀의 공용어(national language)는 필리핀어(Filipino)와 영어이다. 하지만 필리핀 사람 상당수는 공용어인 필리핀어 대신 자신이 사는 지방의 언어를 주로 사용한다. TV 드라마나 라디오 때문에 필리핀어(타갈로그어)를 이해는 하지만 말은 하지 못한다는 사람도 종종 보게 된다. 바콜로드 여행을 할 때 민다나오 쪽에 있는 작은 섬에서 왔다는 남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 동네 사람 그 누구도 남자가 쓰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쓰는 말은 그가 온 섬의 사람들만이 쓰는 말이란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사람들은 말이 아닌 얼굴로 이야기할 수 있고, 필리핀 사람만큼이나 얼굴에 친근감을 가득 지니고 다가오는 사람들도 드물다는 것이다. 가끔 "필리핀 여행을 하고 싶은데 말이 안 통해서 걱정입니다."라는 분을 만나게 되는데 군걱정이다. 고마운 일이지만, 필리핀에서는 포켓용 타갈로그어 책이나 핵심 패턴 영어책보다 방긋 웃음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어나 타갈로그어를 하지 못한다고 걱정하기보다는 인간에게 언어 외의 것들이 얼마나 잘 통하는지 경험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무릇 입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통하지 않아도 마음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통하는 법이 아니던가.


마닐라 마카티. 하굣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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